박사과정 프로포절은 몰아치기가 안되더이다....
교수님, 금요일까지 프로포절 초안 보낼게요! (I'll send my proposal by Friday).
항상 영어의 이 애매함, 'by' 는 과연 토요일로 넘어가는 자정 직전까지 인가 아님 적당히 5-6시 사이의 퇴근 전 까지인가... 물론 중요하지 않다. 미리 미리 해뒀으면.
나는 마감타임 직전의 긴장감으로 일을 몰아서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저께의 나는 어제의 나를 믿었고 어제의 나는 지금의 나를 믿었지만, 오늘의 나는 그들을 배신하고 말았다. 사실, 배신이기 보다는 과거의 나 자신이 나를 과도하게 믿었던 탓.
오늘은 토요일인데, 금요일까지 보낸다던 프로포절을 오늘 오후 5시가 넘어서 보내고 말았다. 아뿔싸. 머릿 속도 멍. 제대로 써서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싸질러 놓고 교수님께 bs를 드린 건 아닌지 조마조마.
금방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던 'chapter two' 는 대단한 작품이 되고 싶어하는 챕터님의 욕심 때문인지, 텅텅 빈 것 같은 내 머리 때문인지 자꾸 나를 붙들고 있다가 시간을 아주 대차게 삼키셨다. 그러다 결국, 오늘은 03:20 am, 새벽에 퇴근해, 07:30 am 아침에 도로 도서관에 출근해 하루를 딜레이 하고 제출.
후아, 뭐가 문제지? 갑자기 석사과정중에 몇 번이고 아주 재밌게 봤던 Tim Urban의 Ted 강연이 생각났다. 제목은 "Inside the mind of a master procrastinator." 그도 한 때 박사과정생이었다... 그렇다. 그는 1년 정도는 준비해야하는 90쪽 정도의 학위 논문을 마감 3일 전부터 겨우 쓸 정도로 항상 미루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자꾸 미루는 사람의 뇌 구조는 좀 다른데, 합리적 결정자 (rational decision maker)가 열심히 활동하기 보다는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원숭이 (Instant gratification monkey) 가 뇌를 지배하며 "유튭 볼까? 인스타그램 할까? 어? 나 안나가려고 했는데 친구가 부르네?" 등등 한참을 딴 짓을 하게 둔다고 한다.
그러다가 패닉 몬스터 (panic monster)가 마감 직전에 등장해 커리어가 위험에 빠지거나 망신을 당하기 직전의 나를 구한다고 한다. 그제서야 내 안의 합리적 의사 결정자가 깨어나고, 패닉 몬스터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마감할 수 있는 것. 사실 나는 그 귀엽고 못생긴 패닉 몬스터 그림을 책상에 붙여뒀다. '어차피 닥치면 하게 되어 있어' 하고. 그리고는 그때 그때 그냥 하고 싶은거 하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마감이 명확하지 않은 일'에 있다.
박사과정 중에는 코스웍(강의) 때 제출하는 기말페이퍼(프로포절)이나 과제들, 그리고 컨퍼런스 논문 제출 마감일을 제외하고는 "마감이 없다." 잘 모르긴 해도 누군가가 박사과정을 7년 했다더라... 누구는 10년이다 했다더라... 카더라 전설들이 내려오는 이유다.
물론 내가 박사과정 중인 경영대는 '무조건 5년 안에' 라는 조건이 걸려 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전의 타임라인과 퍼포먼스들은 의외로 모두 내가 주도해야 하는 구조다. (물론, '권장' 타임라인이 가이드 북에 있다.)
회사를 그만두고 연구를 시작한 것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남 핑계대지 않고 주도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제법 관대한 내가 '괜찮아' 해버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여유로움과 이를 넘어선 나태가 찾아오기도 한다.
작년 까지만 하더라도 학기말 페이퍼나 연구프로포절을 준비할 때는 나름의 마감을 세워두고 '3-4일 전에 밤 몇번 새면 되지! 하고' 실천해왔다. 뭐 조금 미루고 있다가도 마감에 닥쳐서 후다닥 해버리는게 몰입해서 효율을 내기 좋았다고 생각이 들었고, 체력적으로도 자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곧 40에 접어드는 나이다보니, 이젠 체력도 좀 달리는 것 같고 밤 늦게까지 작업하면 다음날 일정에 매우 무리가 가기 시작한다. 억 그래. 40이다. 반팔십. 이렇게 지내다가는 큰일이라는 생각에 매일의 루틴을 만들어 일을 미리 쪼개서 하는 노오오력을 시작했다.
바로 생활스터디. 뭔가 고시공부 하는 느낌이랄까. 첫날에야 기분 좋았지만 갈수록 괴로워진다. 난 원래 이런사람이 아닌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내가... 별별 생각이 다 든다.
생활스터디는 개강 직후부터 시작했고, 매일의 목표는 '무슨 무슨 챕터 끝내기' 였다. 재미있는건, 오늘의 그 데일리 목표가 내일로, 모레로 이어졌다는 것.
그렇다. 박사 학위 논문 프로포절이라는 매우 큰 일을 나는 과소 평가해서 30일 이상 걸려야 할 일을 10일 -15일 안에 하려고 시도하다 보니, 자꾸 욕심도 늘고, 역량은 부족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다시, 결국 마감기한이 애매한 큰 일은 내 능력을 좀 보수적으로 평가하고 task를 잘게 쪼개서 daily 루틴으로 만들어야한다는 것을 크게 느끼고 있다. 최대한 자세하게.
MBTI 맨 뒷자리 97% P로 근 40년 살아온 사람이 어떻게 한번에 변할까 싶지만... 어쩌면 큰 측면에서 등장한 패닉 몬스터 덕에 조금씩의 생활 패턴과 일처리 방식을 바꿔나가고 있다.
처음부터 갑자기 미친듯한 계획을 세우는건 여전히 어렵고 잘 되지 않는다. 그래도 작은 것이라도 딱 하나씩 쪼개서 작은 성공을 맛보니 기분은 좋아진다. '미루지 않기' 보다는 '미루기를 줄이기'로 '덜 닥쳐서 하기'를 실천해보고 있다. 천성은 천성이고 바꿔나가는 재미를 좀 더 느껴봐야겠다. 뭐 97%에서 80% 정도로 낮아져 조금은 내 시간을 컨트롤 해보고 싶지 않을까?
위에 얘기했던 Tim Urban의 강연을 첨부한다.
https://youtu.be/arj7oStGLkU?si=dnV6vXS0hEVb2_V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