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달콤씁쓸했던 한남동에서의 3개월
폭풍 같은 1년(이전 글: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을 보낸 뒤, 업무적인 전문성을 기를 수 있고 스타트업보다는 안정적인 브랜딩/디지털 에이전시 몇 곳에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다. 돈도 없었고, 얼른 취직을 해야 했다.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꾸준히 관리되고 있는 회사 페이스북과 홈페이지의 포트폴리오, 직원들끼리 돌아가면서 쓰는 블로그, 업력도 7년 차로 탄탄했고 고객사도 탄탄했다. 분명 객관적으로 괜찮아 보이는 회사였다.
사무실은 한남동에 자리 잡고 있었고, 힙하고 깔끔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면접을 진행한 두 명의 실장(각각 기획, 디자인)은 한남동 힙스터들같이 스타일도 세련돼 보였다. 게다가 깜찍한 강아지 한 마리까지 나를 반겨줬다.
두 명 다 나를 마음에 들어 했고, 바로 출근하기로 했다.
내가 원하던 연봉도 맞춰주었고(기존이 너무 낮아서 두근거리면서 희망 연봉을 제시한 기억이 난다.), 입사 전 인스타그램 스토킹(?)을 한 결과 대표와 기획실장이 부부였는데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딱 봐도 부자들 같아 보여서 마음에 들었다.
"회사가 망하지는 않겠구나, 내 월급이 밀릴 일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업에 집중하느라 출근하지 않는 대표를 제외하고 직원들은 실장 두 명, 기획팀의 나와 사수 한 명, 디자인팀의 실무 디자이너 두 명 총 6명이었다. 강아지 덕분인 것 같기도 한데 분위기는 참 좋았다. 매일같이 한남동 맛집들도 하나씩 섭렵했고, 저녁 약속 잡기도 좋았다. 야근도 거의 없었다.
주 업무는 해외 유명 주류회사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콘텐츠를 만들고 온라인 광고까지 집행하는 거였다. 광고도 다른 애드테크(Ad tech) 에이전시에 외주를 주었기에 일주일에 소셜, 광고 콘텐츠 몇 개만 만들면 되어서 솔직히 업무도 꿀이었다.
그 외에도 막 사업을 시작하는 회사의 브랜딩 컨설팅도 해주었는데 홈페이지를 제작하기도 하고, 제약회사의 신제품 이름을 짓는 일을 하기도 했다.
당시 내 고민은 일이 너무 편해서 전문성을 기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지난 회사와 비교했을 때는 여러모로 좋았기에 만족하면서 다니고 있었다.
주어진 일만 하면 됐고,
업무, 사람 스트레스도 없었고,
매일 칼퇴를 했고,
봄이었고,
모든 게 평화로웠다.
그러다 C 광고회사의 외주로 S 전자 노트북 디지털 콘텐츠 제작 대대행을 맡게 됐다. 갑자기 업무 태세가 확 전환됐다. 기획은 C 회사에서 전담했기 때문에 기획팀은 불필요했고, 회사의 공동 대표 격인 기획실장과 디자이너들은 밤을 새워 일하기 시작했다.
실장이 점점 지쳐가는 게 보였다. 이제 지금까지처럼 편하게 콘텐츠를 만드는 건 경쟁력이 없었다. 사람들은 더 자극적이고 참신한 콘텐츠를 원했다. 더 치열하게 고민해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지 않는 이상 소형 에이전시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존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기간이 끝나가서 새로 비딩에 참여해야 하는데 실장이 비딩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조짐이 이상했다.
그리고 날 좋던 6월 초, 실장이 우리를 불러놓고 말했다. 이번 달 말에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고. 디자인 실장도 회사 창립 멤버로 함께한 세월이 7년이었는데 그날 우리와 함께 통보를 받아서 정말 당황해하는 눈치였다.
우리들은 멘붕에 빠졌고, 눈물을 흘렸고, 실업급여와 보상 등을 논의하며 일을 정리해갔다.
자괴감이 많이 들었다.
왜 내가 선택하는 회사마다 이러지,
이래서 대기업에 가야 하는 건가?
적어도 잘리거나 월급이 밀릴 일은 없으니 안정적인 게 최고인 건가?
그렇게 짧고 소소했던 한남동에서의 3개월이 끝났다. 슬펐지만 3개월 동안 업무적으로 얻은 게 없지는 않았고 다음 회사에서도 몇 가지는 잘 써먹을 수 있었다.
1. 큰 규모(월 2천만 원 이상)의 소셜 광고를 집행하는 법
2. 큰 브랜드의 일관된 콘텐츠를 만드는 법
3. 홈페이지 체계적으로 기획하는 법
4. 신제품 네이밍 아이디어를 얻는 법
5. 프로처럼 제품 사진 찍는 법...
오래전 끊어버린 인스타그램을 다시 켜보니 실장과 대표는 본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재밌게 살고 있었다. 지금은 아무런 감정이 없지만, 한 때는 그들이 정말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