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애증의 첫 번째 스타트업
진심으로 해결하고 싶은 문제가 있고,
그 문제를 스스로가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이를 해결할만한 독보적인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확실하게 있어서
창업을 하는 건 분명 옳은 일이다.
하지만, 단순히 사장을 하고 싶어서, 유명세를 타고 싶어서, 나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헛된 희망으로 무턱대고 사업을 시작하는 건 수많은 사람들을, 특히 직원들을 무척 힘들게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스타트업들이 너무 많다.
"예정되어 있던 투자건이 무산됐습니다.
당분간 월급을 주기 어렵겠네요."
대표가 직원들을 불러 모아 놓고 통보했다.
우리는 엄청 동요했다.
보통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면 즉시 탈출하기를 조언한다.
우선, 여전히 회사의 비전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입사한 지 6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무런 실적도 내지 못하고 퇴사를 할 수는 없었다. 나의 커리어를 위해, 그리고 깨알 같은 퇴직금을 위해서라도 한 직장에서 최소한 1년은 버텨야 한다고 생각했다. 함께 했던 직원들, 서비스에 대한 애정이 남아있기도 했다.
월급이 밀리기 시작하면서 크게 6가지 정도의 일이 일어났다.
사건의 발단은 CTO로 있었던 직원이 갑자기 퇴사하면서였다. 퇴사 후 본인의 사업을 차렸고, 이 사실을 투자사에도 알렸다. 투자사 입장에서는 당연히 CTO가 없는 회사에 투자할 수는 없었을 거다.
대표 입장에서는 배신당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퇴사한 전 CTO의 욕을 엄청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안타까웠지만, 대표에게도 이런 상황을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은 있는 거였다. 모든 걸 떠나간 CTO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월급이 밀려 떠나가는 직원들에 대해서조차 험담하는 대표에 대해 점점 정이 떨어졌다.
대표 입장에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매일매일이 지옥 같을 거다. 처음에는 다 같이 이 어려운 상황을 해쳐나가보자고 했다.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군주론 등의 책을 대놓고 정독하더니 본인의 말에 딴지를 거는 직원들에게 무자비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기술도 없는 내가 만만해서였을까? 특히 내게는 더 심하게 굴었다. 이런 사람을 믿고 따라도 될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있었던 개발자들은 거의 다 더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를 잡고 떠나갔다. 대표는 떠나간 직원들을 배신자라고 뒤에서 욕 했다. 제대로 된 송별회는 당연히 없었다.
나와 유독 가까웠던 초기 멤버였던 디자이너가 회사를 그만뒀을 때 가장 힘들었다. 회사에 더 이상 내 편은 없는 기분이었다. 나랑 친하다는 걸 알면서도 대표는 내게 디자이너의 험담을 정말 많이 했다. 인신공격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처음 회사가 곤경에 빠졌을 때 다 같이 으쌰 으쌰 해쳐나가 보자 먹었던 마음은 어느새 '1년만 버티자'로 바뀌어 갔다. 대표한테 말로는 회사에 계속 남고 싶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회사에 대한 마음이 아예 뜬 상태였다. 그게 그대로 보이고 느껴졌을 거다.
면담은 항상 징글징글했다. 대표는 나에게서 무언가를(아마도 애사심?) 더 끌어내려고 했고, 욕도 하고 소리도 많이 질렀다. 나 역시 따박따박 대꾸했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도 했다. 당신 때문에 정신과 상담까지 받을 생각이라고도 말한 적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했다.
남아있던 직원들은 대표가 유독 나한테 못 되게 군다고 했다. 아마 전문성이 없는 인력이니, 내 발로 퇴사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 인생 최악의 암흑기였다. 잠도 못 자고, 항상 불안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를 그토록 증오한 적이 없었다.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노력에는 시간이 따르고, 자원은 부족했다.
실현 불가능한 컨셉의 그럴싸한 제품을 기획해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에 올렸지만 법적인 이슈로 프로젝트를 내렸다. 동영상 제작, 목업 제품 제작 등 비용은 비용대로 들이고 또 하나의 큰 실패를 한 거다. 컨셉을 마음에 들어한 유명 외신에 기사가 실리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받아 펀딩이 이틀 만에 성공하다 못해 초과 달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현하기 어려운 제품이었던 만큼 오히려 프로젝트를 취소한 게 잘됐다 싶지만.
나의 의욕은 더더욱 사라져 갔다.
회사가 위기에 쳐했으니 마케팅 업무는 의미가 없었다. 나는 어느새 대표가 하던 경리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매우 까다로운 투자금 정산 작업도 있었는데 그 업무를 하면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숫자는 맞지 않았고, 상대편 담당자는 무책임했다. 대표도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폭발해 엉엉 울어버렸다.
한 때 존경했던 한 사람을 가장 증오하게 되었다. 악몽에 시달리고, 죽여버리고 싶기도 했다. 내 인생을, 내 젊음을 망쳐버린 사람이었다.
결국 1년을 꼬박 채우고 퇴사했다.
버티고 버틴 3~4달 동안 지옥에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애매하게 남아있을 바에 버틴 것은 잘 한 결정이었다.
대표는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가 대박 나 초기에 반짝 성공을 했다. 하지만 직원들마저 제품의 실제 성능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정도로 불량률도 많았고, 선한 취지로 회사와 협업한 업체들에도 일정, 납기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을 안겨줬다.
대표의 인터뷰 기사 대부분에서 대표는 마치 천사처럼, 선한 영향력을 가진 귀인으로 묘사돼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 농담 삼아 거짓말하기 힘들었다는 식으로 말하고는 했다. 웃어넘긴 적이 많지만 놓치면 안 되는 포인트였다.
나는 정말 순진했고, 사람을 너무 잘 믿었다. 사람들의 본성은 결국 다 따뜻하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없고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많은 게 결정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 역시 고작 2년차 주니어였기에 판단력이 부족해서 얼른 탈출하지도 못 했고, 감정 표현 등에 있어서 많이 부족했고, 대표에게 상처도 줬을 거다. 그래도... 내가 받은 상처만 하지는 않겠지.
스타트업에 입사하고 싶다면
대표, 경영진이 유명 대학, 유명 기업 출신이라는 허울에 속지 말자. 그럴싸한 인터뷰 기사들도 믿지 말자.
매출, 순이익 등 객관적인 지표들을 가장 먼저 확인하자.
아, 밀렸던 월급은 퇴사 후 3개월 정도 뒤에 다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