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이직 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준버그 Feb 22. 2020

순진한 스타트업 마케터의 초보적인 실수들

#2-1 심해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

언론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이스라엘의 스타트업에 대한 취재를 했었다. 이스라엘에서는 창업을 7번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도록 정부에서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때부터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에 빠져들었다. 우리나라도 스타트업에 더 투자를 한다면 혁신적인 기업들이 많이 나올 수 있을 텐데 제약이 많은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스타트업에서 일 하기만 해도 열정적인 동료들, 비전을 가진 대표와 으쌰으쌰하며 즐겁게 일 할 수 있겠지라고 기대한 것은 단단한 착각이었다. 나는 스타트업의 ‘대표’가 아니라 ‘직원’으로 입사할 예정이었고, 그 둘의 간극은 정말 정말 크기 때문이다.


나의 두 번째 회사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스타트업

홍보대행사 퇴사 후 2주 간 발리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내 다음 정착지를 그려보았다. 스타트업 구인구직 사이트인 로켓펀치에 수없이 들락거리며 나와 핏이 맞을 것 같은 기업을 찾았다.


그러다 운명처럼 한 곳이 다가왔다.


성의 있게 작성된 깔끔한 디자인의 직무 소개, 경력이 짧은 나도 지원할 수 있었던 신입 마케팅 매니저 포지션. 무엇보다 해외에서 먼저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진 제품이어서 해외 쪽 업무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한 안전한 세상’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스타트업이었기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력서를 잘 정리해 냈고, 바로 면접을 봤다.


총 11명, 여자 직원은 나 혼자인 곳에서 일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작던 연봉도 훨씬 더 깎여서 입사했다. 그래, 스타트업이니까, 비전이 있는 회사니까 조금만 더 커지면 적절한 보상이 있을 거야! 나는 여기에 뼈를 묻을 거니까!


좋았던 건 단 두 달

처음 두 달은 정말 좋았다. 내가 가진 스타트업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그런 회사라고 생각했다.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불렀고, 출근 시간도 10시였고, 점심 식대도 지웠됐으며 무엇보다 직원들 모두가 똑똑하고 친절하고, 재밌었다. 대표도 스스럼없이 편하게 직원들을 대했다. 매출이 크지는 않았지만 우리 제품을 찾는 고객들이 꾸준히 있었다. 예정된 투자건도 있었다.


나는 마케터로 입사했기 때문에, 스타트업 마케팅 관련 글과 책을 열심히 읽으며 한정된 자산으로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디지털 마케팅에 집중해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을 재정비하고 꾸준히 콘텐츠를 채워나갔다. 적은 금액이었지만 광고도 집행했고, 저렴하게 참여할 수 있는 전시회에도 나가 회사와 제품을 알렸다. 제품의 특성을 활용한 브랜드 캠페인도 진행했다. 적절한 시점에 보도자료를 배포해 근무했던 한 해 동안 2백여 건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고, 기자들과 대표 인터뷰도 꾸준히 어레인지 했다.


하지만 이 모두는 회사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스타트업에서, 그것도 하드웨어 스타트업에서 디지털 마케팅과 PR, 브랜드 캠페인은 큰 의미가 없었다. 판매/제휴처를 적극적으로 찾아 제품을 많이 파는 게 실질적으로 더 중요했다. 그런데 나는 ‘마케팅 매니저’라는 포지션에만 치중해 ‘내가 생각하는 마케팅’, ‘내가 하고 싶은 일’들만 계속했다.


이게 잘 못됐다는 걸 깨닫기는 건 정말 어려웠다.


스타트업에서 마케팅을 잘하려면,

01 시장에서 회사의 객관적인 위치를 파악한다.

02 적절한 타깃과 그들이 모이는 곳을 찾는다

03 최대한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우리 제품에 관심을 가질 만한 방안을 모색한다

04 이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반복한다


이게 기본이 되어야 하는데 나는

01 우리 회사의 비전은 짱이니까 사람들이 무조건 좋아해 줄 거야

02 우리의 타깃은 부모들이지만 페이스북 마케팅이 대세니까 페이스북을 중점으로 해도 괜찮을 거야

03 기사 많이 나오면 장땡이지! 대기업들도 실리고 싶어 안달 내는 매체에 기사가 실리다니 나는 짱이야

04 다른 스타트업들도 이렇게 하니까 우리도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아 멘붕… 왜 안 팔릴까?


이렇게 된 거다. 정말 순진하고 초보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스타트업들은 ‘스타트업’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을 뿐 각각이 모두 다른 특성을 가진, 다른 서비스의 회사들인데 잘 나가는 스타트업들이 이렇게 한다고 우리 서비스의 특성과 맞지도 않는 마케팅을 하는 건 정말 큰 착오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기업, 업체들과 제휴 활동을 주로 하게 되었다.


그러다 회사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홍보대행사는 정말 헬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