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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버그 Feb 21. 2020

홍보대행사는 정말 헬일까

#1 그래도 기초는 탄탄히

여러 길을 모색하던 와중에, 헤드헌터로 계신 한 지인으로부터 홍보대행사 한 곳을 추천받았다.


영어를 많이 쓰는 환경에서 일 하고 싶었던 터라 외국계 IT기업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갔다.


취업 전 세 번의 짧고 긴 인턴십을 했다. 어디에서든 상사들로부터 빠릿빠릿하게 일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그래, 작은 회사에서 내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보자!
대행사에서 몇 년만 버티면 고객사로 이직하는 경우가 흔하대!
외국계 대기업 위주로 홍보를 하니까 이력에도 도움이 될 거야!


이런 마음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한 중소규모 홍보대행사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누구 하나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첫 출근

입사 첫날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정식으로 입사한 첫 직장인만큼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말끔하게 차려입고 회사에 들어섰다. 사무직원이 내가 일하게 될 팀으로 안내해줬고, 그곳엔 모니터가 뚫어질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곧이어 사수로 보이는 직원이 출근했고, 그날 하루는 짧은 번역과 기사 정리 등을 하면서 숨 가쁘게 보냈다. 퇴근 무렵, 지친 내 모습을 본 상사 중 한 명이 “내일 꼭 나와야 해요~”라고 장난삼아 말했던 기억이 난다.


보통 홍보대행사 1년 차는 대기업 3년 차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로 업무 강도가 매우 높다. 기본 근무 시간은 8시부터 7시. 아침에는 고객사에 보낼 뉴스 클리핑, 저녁에는 지면에 기사가 떴는지 확인하는 가판 작업까지. 기사 작성, 기자 미팅 등 기본 업무 외에 고객사에서 들어오는 요청 사항은 바로바로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하루 종일 거의 쉴 틈 없이 일 해야 했고, 비딩, 플래닝 기간이 걸리면 철야는 기본이었다.  


홍보대행사의 단점을 정리해보자

단점은 크고 많다. 우선 앞서 말한 것처럼 업무 강도가 매우 높고, 주말에도, 눈치 보아 겨우 얻은 휴가 중에도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워라밸은 상상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 회사 입장에서는 고객사에 밉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고객사가 요청하는 일은 업무 외 시간이건 약속된 업무 스코프가 아니건 거의 다 처리하게 시킨다. 그리고 그걸 처리해야 하는 건 말단 실무자들이다.


그런데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경우가 더 많듯, 이 회사의 가장 큰 문제는 대표였다.


“일을 이딴 식으로 밖에 못 해?”는 기본,

(퇴근 20분 전에 일을 주고, 급한 일이 있어 퇴근하고 집에서 일 하려 했던 직원에게) “이거 왜 안 하고 퇴근했어!”

“XX는 뚱뚱해서 고객사 미팅에 데리고 나가면 안 돼.”


조금이라도 덤벙대는 신입 사원들은 예외 없이 불려가 수도 없이 혼나야 했고, 일을 잘 하는 직원이어도 외적인 기준이 본인에게 부합하지 않는다면 인신 공격은 서슴지 않았다. 본인의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은 다독여서 동기 부여를 주는 게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혹은 단체 메일로 면박을 줘 결국 본인 스스로 퇴사하게 했다.


그녀는 칼 같고 날카로운 성격의 엄청난 커리어 우먼이었다. 일적인 능력은 인정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인 만큼 이런 대표 아래서 내 젊음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 외에도 고객사의 갑질과 폭언, 은근슬쩍 본인의 업무를 떠넘기는 상사들. 작은 회사이지만 난무하던 정치질까지.


닮고 싶은 상사는 단 한 명도 없었고 나는 어서 이 우울한 곳을 떠나고 싶었다.  


숨은 진주같은 장점들

이 많은 단점 속에서도 배운 것은 분명 있다. 다행히 업무적으로는 괜찮은 사수를 만나 일 처리를 꼼꼼하게 배웠고, 수없이 많은 기사의 초안을 쓰면서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전달하는 글쓰기 능력을 기를 수 있었다. 외국계 IT회사들의 홍보를 주로 담당했기에 추후 계속 일 하게 되는 IT업계와 용어에 대한 이해도도 높일 수 있었다. 홍보 업무의 기본적인 체계도 A부터 Z까지 완전히 익히게 됐다.


하지만 가장 큰 수확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입사 첫날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그들은 나와 같이 숨 막히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신입 사원들이었고, 우리에게는 공동의 적인 대표와 고객사가 있었다. 수없이 많은 야근을 함께 하면서 전우애를 쌓았다.


지금은 어느새 모두 5~6년 차 회사원으로, 훨씬 더 좋은 직장에서 주도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 중에는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 될 좋은 친구가 된 사람들도 있고, 업무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서로 편하게 연락해 조언을 얻는 사람들도 있다.


회사는 퇴사율이 매우 높았다. 다닌 지 1년쯤 되자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 모두 한 명 두 명 떠나거나 떠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어렵게 내 인생 최초의 퇴사를 결정하고 회사를 나오게 됐다.


1년 동안 홍보의 기본은 다 익혔다고 생각했고, 이를 적용해 내가 키워나갈 수 있는 브랜드에서 더 성장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론홍보의 바운더리를 벗어나 마케팅이라는 보다 광범위한 분야로 커리어를 옮기고 싶었다.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퇴사 후, 막 스물일곱 살이 된 나는 발리로 2주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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