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다니엘 크레이그!

007 노 타임 투 다이와 다니엘 크레이그

by starka

대학교 3학년 전공 수업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소설의 이해2' 비슷한 강의 제목이었을 것이다. 각자 마음에 드는 소설을 읽고 순서를 정해서 소설에 대해 발표하는 형식의 수업이었는데, 그날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발표 주제였다. 나 역시 굉장히 재밌게 본 소설이라 그날따라 더 집중해서 발표를 들었다. 하지만 그날 발표 내용보다 교수님의 마지막 코멘트가 내게 더 강렬하게 남았다.


"신경숙 작가의 작품 세계 한계는 아마 육아의 경험이 없는 것이 그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생각한다"


거의 10년이 되어가는 강의이기 때문에 교수님의 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는다. 교수님께서는 육아를 거쳐야 인간적으로 한 단계 성숙하고 인간의 더 깊은 부분을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셨다.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교수님께서도 아이의 엄마로서 당신도 그렇게 느꼈다고 말씀하셨고, 단순히 '남자'와 '여자' 성별의 차이에 국한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육아를 경험해야 더 진일보 한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재미있는 것이 다른 강의 내용은 많은 부분 기억 속에서 소실되었어도 교수님의 그 마지막 코멘트는 내게 강렬하게 남아 인생에서 가장 큰 화두 중 하나로 남았다는 것이다. 30대가 된 지금 교수님의 말씀을 더더욱 곱씹게 된다. 인간은 과연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더욱 성숙해지는 것일까?


사진= 네이버 영화 스틸컷 캡처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은 지 어언 15년이 되었다. ‘007 노 타임 투 다이’를 마지막으로 007에서 하차한다는 기사를 보고는 ‘반드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007 같은 액션 첩보물보다 잔잔한 멜로나 드라마 장르를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례적이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스크린에서 007을 보고 싶게 만들었다. 인간의 삶에서 한 챕터를 마무리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이며 축하받아야 할 일인가.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있어서도 이번 작품은 자신만의 007을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특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특별함을 나는 진지하게 감상하고 축하해주고 싶었다. 작품성이 좋든 나쁘든 간에 말이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2006년 새로운 제임스 본드 역할을 맡으면서 제작자와 감독은 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기존 007들이 완성시켜놓은 인텔리, 젠틀맨 이미지와는 완전하게 다른 우락부락하고 투박한 마치 탱크 같은 모습의 크레이그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지노 로열’이 개봉하면서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그들의 편견을 열렬한 지지층으로 바꿔놓았다. 대역을 거의 쓰지 않고 몸을 사리지 않는 액션 연기와 특유의 분위기를 살려 007 팬들은 물론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의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실제로 상영 당시 역대 007 시리즈 중 수익 1위를 달성하며 화려하게 신고식을 치렀다.


그렇지만 시간은 흐른다. 어느 인간도 흐르는 세월은 비껴갈 수 없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노 타임 투 다이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는 많이 늙은 모습으로 스크린에 등장했다. 스펙터 이후 은퇴한 본드라는 설정이 더더욱 그를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몸을 쓰는 직업이라 신체 변화에 민감한 나로서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마지막 본드에 더욱 이입이 되었다. 한 달 한 달 지날 때마다 회복이 덜 되고 예전만큼 퍼포먼스를 내기 힘든 것을 자각할 때의 그 씁쓸함이란! 그 때문일까 영화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요원이지만 동시에 지친,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풍긴다.


나이가 들었지만 ‘수트빨’은 여전하다. (사진= 네이버 영화 스틸컷 캡처)

이번 영화에서 제임스 본드는 감정을 많이 드러낸다. 그것도 연인에게. 이전의 숀 코너리 때부터의 007을 생각하면 의아하게 느낄 정도다. 007 하면 능력은 있는데 뺀질대고 매 편마다 ‘본드걸’로 상징되는 어여쁜 여인과 짧은 사랑을 나누고 쿨하게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노 타임 투 다이’에서의 본드는 아니다. 죽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동시에 지금의 연인에 대한 감정도 진지하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떠나면서도 막상 다시 만나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는 순정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모습들이 ‘하긴, 그도 이제 정착해야지’라는 생각이 들며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번 편의 본드걸인 줄 알았던 팔로마. 본드걸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엔 크레이그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사진= 네이버 영화 스틸컷 캡처)

게다가 이번 편에는 007의 많은 상징 중 하나인 ‘본드걸’도 나오지 않는다.(노파심에 또 덧붙인다. 여성이 아니라 ‘본드걸’이라는 캐릭터가 007 작품에서 비중 있게 나오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노 타임 투 다이’에서는 철저하게 제임스 본드 개인에게 포커스를 맞춘다. 그의 흘러간 시간, 그의 과거, 그리고 그의 현재 연인과 아이. 그에 따른 본드의 심리적인 변화를 생각하며 영화를 보면 전체적인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보다는 본드 개인의 변화가 더욱 도드라진다. 그의 변화를 보며 요즘 부쩍 생각하는 ‘화두’를 떠올린다.


과연 인간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기르며 더욱 성숙하는 것인가?


다니엘 크레이그의 모습에서 나는 어느 정도 답을 찾았다. 성숙이라는 표현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자신의 가정, 아이가 생기게 되면 인간은 변한다. 가정이 있고 없고의 차이에 따라 아무렇지 않게 선택하던 것들이 심사숙고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한 인간 개인으로서의 진보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선택에 순간에 기존의 사고에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러한 변화는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지 않는 한 절대로 경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서 ‘노 타임 투 다이’를 봤을 때 나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겪는 변화와 선택의 과정을 매우 흥미롭게 보았다. 예전과 다르게 그의 선택의 순간에 연인과 아이가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할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대입하며 고민하는 그 간접 경험이란!


하지만 네이버 영화 평점을 보며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씁쓸했다. 역시 사람은 자신의 바운더리 밖의 사고는 잘하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 지금 당장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가 중요한 것이지 먼 미래의 일은 먼 미래의 일일 뿐이니까. 나 역시 몇 년 전 20대에 이 영화를 봤으면 ‘마지막 007에 전혀 상관없는 신파를 곁들인 망작’이라고 평했을 것 같다. 나이가 무조건적으로 많은 경험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사유와 함께 흘러간 시간은 타인을 좀 더 구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나도 꼰대가 되어가나 싶다가도,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경험한 선배들에 대한 존중과 겸손함이 마음 한편을 뭉클하게 만든다.


제일 마음에 들었던 장면. 그 동안 007에 대한 기억을 더듬게 만드는 오마주 (사진=007 공식 예고편 캡처)



다니엘 크레이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가정이 생김에 따라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에 대한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말을 아끼겠다. 다만 나는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그 책임감과 걱정, 아쉬움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6대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 한 남자로서 내가 겪지 못한 ‘Next step’을 밟고 제임스 본드답게 퇴장한 그를 위해 남몰래 조용히 박수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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