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애관
영화 '500일의 썸머'는 나의 연애관을 확립시켜준 인생 영화다. 우스갯소리로 처음 봤을 때는 여자 주인공인 썸머를 욕하지만 두 번 세 번 영화를 거듭해서 볼수록 남자 주인공인 톰을 욕하게 된다는 바로 그 영화다. 내가 한창 연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할 때 큰 도움을 받은 터라 주변에 연애와 관련된 고민이 있거나 그로 인해 방황하는 친구들에게 꼭 추천하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내 나름대로의 생각과 함께 연애관을 정립해봤다. 연애를 할 때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는 '룰'이라고 해야 할까, 연애를 하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마음가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마음가짐은 세 가지다. 존중, 신뢰, 용기. 이 세 가지가 내가 생각한 연애관이다.
1. 존중
연애를 할 때 존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은 '상대방을 배려하기'로 생각한다. 그 말은 반 만 맞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만이 존중의 모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첫 연애에서 겪는 실패를 살펴보자. 내가 본 가장 많은 실패는 배려를 표방한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상대방에게 온전히 나를 맞추는 행동을 '존중'이라고 착각하면 나는 물론 상대방도 힘들다. 나는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행위가 일종의 '소유욕'에서 온다고 본다. 상대를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닌 나의 '소유물'로 인식하기 때문에 상대를 마치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의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먹는 것, 자는 것, 스포츠 센터에 등록하는 것, 하루에 커피를 몇 잔을 마시는 지를 '너를 위해서'라는 무자비한 명목 하에 끊임없이 참견하고 통제한다. 그들이 주로 말하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상대방을 '소유물' 혹은 '갓난아기' 수준으로 여긴다. 이를테면 점심 식사 메뉴를 고르는 데에도 '네가 먹고 싶은 걸로 먹자 나는 다 좋아' 같은 말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자신의 아이가 너무 예쁜 나머지 모든 것을 아이의 입맛에 맞춰 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 차라리 그들의 관계는 연인과 연인의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더 가깝다. '스스로도 통제하지 못하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 말이다. 그들이 부모와 한 가지 다른 점은 그들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닌 조건적인 사랑을 베푼다는 것이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줬으니 나에게 이만큼의 사랑을 줘'
그들의 말하는 '이만큼'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애정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희생을 들먹인다. 주로 집까지 데려다 주기, 더 많은 데이트 비용 지불하기, 값비싼 선물 주기 같은 것들이다. 그들은 그것을 대가로 '한 시간 이상 연락두절되는 일 없기', '잠들 때면 전화하기', '주말마다 꼭 함께 만나기' 같은 것들을 요구한다. 얼마나 유치한가?
그들 자신이 의식했던 아니든 간에(대부분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상대방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닌 한 사람의 이성을 가진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의 정립이 이루어질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반쪽을 찾을 것이다.
2. 신뢰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중하게 된다면 그다음 단계는 '상대방을 신뢰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신뢰하는 것은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이성적인 인간으로 존중했을 때야만 이뤄질 수 있다. '식사 때를 지켜 식사하는 것', '늦지 않게 자는 것', '꾸준한 운동을 하는 것', '자기 계발에 힘쓰는 것' 따위를 나름 자신의 계획을 세워서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뢰다. 기본적으로 이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상대방과의 의견 조율이 원활히 이뤄질 수 있다.
연애가 어려운 점이 상대방과의 계약 아닌 계약 관계이기 때문이다. 서로 정확한 행동양식이나 범위를 객관적인 문서를 통해 정해놓을 수 없기 때문에 연애의 관점에서 나와 상대방의 의견은 계속해서 조율될 수밖에 없다. 연애 기간 동안 계속해서 고치는 것을 반복하는 이른바 '살아있는 계약'인 것이다. 일반적인 계약에서는 중요한 것은 '나의 손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익은 최대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애는 아니다. 연애라는 계약에서 최고의 목표는 '서로 다른 세계가 원만히 융합하는 것'에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질 때의 충격파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올바른 연애 계약일 것이다.
늦은 밤 작업을 해야 하는 프리랜서 A와, 평범하게 9 to 6 근무를 하는 회사원 B가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B의 입장에서는 밤늦게 자서 아침 늦게 일어나 식사도 대충하고 운동도 하지 않는 A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못마땅하다. 그래서 그와 대화를 하기로 결정했다.
<1>
B: 매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생활패턴이 엉망이잖아.
A: 내 일 특성이 이런 것을 어떡해.
B: 그러다 몸이라도 망가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A: 내가 알아서 할게 걱정 마.
답답함이 느껴진다. 그럼 이 대화를 존중과 신뢰의 방식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2>
B: 매일 밤늦게 작업하니까 몸이 상할까 봐 걱정돼 무슨 방법이 없을까?
A: 그러게. 나도 좀 걱정이 되긴 해.
B: 수면시간은 어쩔 수 없으니 운동이랑 식사를 제대로 챙겨 먹는 것부터 하면 어때? 내가 도와줄게.
A: 그래 내일부터 한 번 해볼게. 고마워
<1>의 B는 화가 났다. 단순히 A의 생활패턴 문제가 아니다. A를 '변화할 의지도 없는 한심하고 나약한 인간'으로 스스로 규정했기 때문에 화가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A의 생활패턴이 엉망인 것에 대해 연인인 B가 화가 날 수는 있다. 그것은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걱정에서 비롯된 화가 증폭되는 과정은 B가 생각하기에 A는 절대로 생활패턴을 고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니 혼자서 A에 대한 생각을 거듭할수록 화가 중첩되어 첫 말투부터 가시 돋친 말을 뱉는 것이다. 느닷없이 상대방에게 감정으로 때려 맞은 A의 입장에서는 방어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2>의 B는 A를 동등한 인간이자 이성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인간이라고 존중했다. 또한 대화를 통해 그가 자신의 걱정을 덜어줄 것이라는 '신뢰'도 보였다. 단순히 대화법의 차이가 아니다. 대화법을 바꿈으로써 일시적으로 분란을 조정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존중과 신뢰가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
3. 용기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존중하고 신뢰한다고 해서 그 관계가 단단하게 결속되는 결과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오히려 나의 존중과 신뢰를 이용할 수도 있고, 존중과 신뢰를 보여도 도저히 좁혀지지 않는 성격차이가 있을 수 있다. 아니면 둘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제3의 세력이 개입해 관계를 갈라놓을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마지막 퍼즐이 바로 '용기'다. 나에게는 이것이 가장 어려웠다.
여기서 '용기'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어떠한 여건에도 굴복하지 않을 용기다. 이 용기는 두 사람의 존중과 신뢰를 기반으로 한 단단한 결속을 무기로 어떠한 외압도 해쳐나갈 수 있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집안의 반대나, 경제적인 문제에도 흔들리지 않고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이 첫 번째 용기다.
나머지 하나는 '나를 위한 용기'다. 나의 존중과 신뢰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깨져버렸을 때. 상처 받은 나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다는 용기.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 그리하여 두 번 다시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좌절의 구덩이에서도 기어코 기어 나와 또 다른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용기.
두 가지의 용기 모두 하나에서 기반한다. 바로 '나' 자신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 내가 나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존중하는 것과, 그러한 나의 선택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바탕이 되어야만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탄탄한 '용기'가 어떠한 감정의 소용돌이에서도 나를 보호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