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인인가 인생의 동반자인가
요한복음 15:13 KRV.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인생에서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이 있다. 휴대폰을 들어 카톡 친구 창을 쓱- 훑어보면 내게는 그런 친구가 몇 명이나 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헛헛해진다. 하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라는 존재란 인생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성공한 인생'이라는 타이틀을 주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보면 꼭 시기에 따라 친구를 바꿔 사귀는 유형이 있다. 같은 반일 때는 늘 단짝처럼 붙어다니다가 학년이 바뀌고 반이 갈리면 여지없이 돌아서서 새로운 단짝을 만드는 그런 사람들. 친구들과 어쩌다 이야기가 나오면 그런 애들은 여지없이 '박쥐 같다'며 비난하고 헐뜯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서로 사회생활을 하게 되자, 많은 친구들이 '박쥐' 같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각자 다른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회사에 취업하면서, 사회에서 새로운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면서 친구들은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SNS에는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얼굴들 대신 새로 사귄 대학 동기나 직장 동료, 사회에서 만난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그들의 행동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머무는 자리가 바뀌면 어울리는 사람이 바뀌기 마련이다. 다만 내가 섭섭하게 느끼는 것은 자주 만나지 못하고 연락을 하지 못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끈끈한 유대마저도 점차 희미해져 간다는 사실이다.
'친구'라는 단단한 이름 아래 맺어진 정신적 유대가 사라짐에 따라 그들은 나를 타인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회사를 나와 자영업을 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보니 친구들은 나의 벌이가 퍽 궁금했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만날 때마다 퇴사하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도 그들은 꾸역꾸역 회사를 다녔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다니는 자기네들하고는 다르게 제도권 가장자리 어딘가를 서성이는 내가 거슬리면서도 신기했던 것 같다. 다만 친구끼리라도 대놓고 수입을 물어보기는 그랬는지 빙빙 돌려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회사원들 연봉이 다 비슷하지. 아, 너는 사업하니까 연봉이 아니겠구나.'
'월급은 적은데 떼는 것은 왜 이렇게 많은지. 이번에 건강보험료를 30이나 냈어. 너는 얼마나 내?'
이렇게 빙빙 말을 돌리다 어느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연봉이 세후 얼마라고? 그럼 세전으로 치면 얼마네.'
듣다가 의아한 내가 '세전 금액이 뭐가 중요하냐, 너희 통장에 얼마가 꽂히는지가 중요하지 않냐.'라고 묻자 그 친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지. 네가 있기 때문에 세전이 중요한 거야. 직장인들과 다르게 넌 4대 보험도 없고 국민연금도 조금 내잖아. 그 차이가 나는 크다고 봐.'
브루투스의 칼에 맞기 전 카이사르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래도 친한 친구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던 이의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자 나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또 다른 친구와의 일화는 이렇다.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을 때쯤 한 친구가 골프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골프를 배우는데 재밌다며 나중에 같이 골프 치러 가자는 이야기였다. 나는 '에이 우리가 아직 골프를 칠 정도는 아니지. 나중에 다들 골프를 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워지면 가자.'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야, 골프가 뭐라고. 골프가 뭐 급이 되어야 칠 수 있는 거냐? 그러는 너는 좋은 차 타면서 골프는 왜 치면 안되는데?'
이때에는 황당함보다도 서러움이 더 앞섰다. 내 친구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해가는 것일까. 기껏해야 서로 바빠서 일 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사이인데 왜 이렇게 말끝마다 '돈돈'거리며 서로를 경쟁상대로 삼게 되었을까. 심지어 나는 그렇게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
골프, 치고 싶으면 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듣자 하니 골프를 치러 나갈 때 한 사람당 30만 원 정도 비용이 발생한다고 한다. 30만 원, 내 또래 직장인 월급의 10분의 1이다. 심지어 그날 같이 있던 친구들 중 골프 이야기를 꺼낸 친구를 포함한 대다수가 실수령액이 300이 채 되질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 달 수입의 10분의 1도 넘는 금액을 단순히 친목을 위한 골프에 사용하는 것이 합리적인가?
물론 그것으로 인해 개인이 행복을 느낀다면 거기에 대해 제삼자가 왈가왈부할 것은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 나의 경제상황을 빗대어 '너도 좋은 차 타는데 나라고 골프를 치면 안 되냐?'라는 논리를 펼치는 것은 나로 하여금 그 친구와의 관계를 되돌아보게끔 하는 것이다.
연달아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나를 몰아붙이는 상황이 생기자 친구라는 것에 대해 회의를 느꼈다. 중고등학생 때 피 끓는 사춘기를 함께 보낸 친구들이 나는 경쟁 상대로 인식한다는 것을 느낄 때 그 기분이란 이 사회에서 내가 있을 곳이 하나 줄어들었다는 고독함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목숨은커녕 내가 만약 성공해도 축하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 아무래도 지금까지의 30년은 인생을 잘못 살았나 싶다.
어쩌면 한 번 친구라고 관계 맺어지면 상대방이 나를 '경쟁사회 속에서의 한 구성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어떻건 외모가 어떻건 '온전한 친구'라고 생각할 것이라는 나의 판단이 순진했던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