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장.
자그마한 원룸. 한쪽 벽면에는 창문이 있고, 그 창문 밑에 침대. 침대 위에는 아직도 개어지지 않은 이불과 베개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다.
젊은 남자가 침대에 기댄 채 방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에 책을 들고 눈을 책에 고정한 채였다. 젊은 여자가 남자의 앞에 서 있었다.
이현석과 박미현.
침대 발치에 놓여져 있는 책상과 책꽂이에는 대학 교재가 꽂혀 있었다.
미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현석 씨, 나 임신했어.”
순간 현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현은 책상 서랍을 열고 통장을 꺼냈다. 그리고 통장을 펼쳐 현석에게 보여 주었다. 235,487.
현석은 한숨을 쉬었다.
한숨 소리를 들은 미현은 현관 오른쪽에 자리한 싱크대로 갔다. 그 옆에 여관에서나 봄직한 자그마한 냉장고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그리고 냉장고와 싱크대 사이 좁은 공간에서 앉은뱅이 밥상을 꺼내더니 그 위에 소주병을 올려 놓았다. 싱크대 선반에서 유리잔 두 개를 꺼내 소주병 옆에 놓았다.
“여보, 현석 씨, 안주는 김치면 되겠지?”
현석은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축하해야지.”
미현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자, 건배. 우리 아기를 위하여.”
현석은 건배를 했다. 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현석은 소주를 입에 털어넣더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대체 왜 그래? 이런 좋은 날에…….”
“미현아, 우리 형편을 보자. 둘 다 학생이고…….”
“난 절대 못 지워. 오빠, 우리 긍정적으로 보자.”
미현은 현석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현석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현아, 현실을 봐봐. 우리 집이나 너네 집이나 부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우리가 돈이 어딨어? 어떻게 낳을 건데……. 그리고 누가 키워?”
미현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누가 키우기는! 우리가 키우지!”
미현의 목에서 쉰 소리가 나왔다.
미현은 뒤로 홱 돌아 앉았다. 방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전화를 거칠게 집었다. 그리고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더니,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미현이냐?”
“엄마, 나야. 잘 지내?”
“나야 잘 지내지. 그래 무슨 일이냐?”
“엄마……. 엄마…….”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
“휴우, 너 애기 생겼구나?”
미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미현을 현석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쨌든, 축하한다.”
나현주, 미현의 엄마는 축하를 하면서도 걱정되는 말투이다.
“이서방 바꿔봐라.”
미현은 전화기를 현석에게 건넸다.
“네, 장모님.”
“자네, 이제 아빠가 되었네. 축하하네.”
“예, 장모님. 감사합니다.”
미현은 전화기를 다시 받더니, “엄마, 끊어. 다음에 다시 할께.”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미현은 현석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나, 휴학해야겠어.”
현석의 말에, 미현의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야. 차라리 내가 휴학을 하는 게 낫지, 안 그래?”
미현이 말했다.
현석은 소주병을 들더니 잔에 가득 따랐다. 두 눈으로 술잔을 한참동안 쏘다보다가, 술잔을 들고 확 마셔 버렸다.
* * *
띠 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울리자, 손혜정은 얼른 버튼을 눌렀다. 아버지인 손진태 회장의 호출이다.
“예, 아빠.”
“너, 회사에서는 회장님이라고 하라고 했지?”
혜정은 속으로 ‘흐흐’ 웃었다.
“아빠! 지금이 80 년댄 줄 아세요? 그런 건 안 통합니다요, 안 통해.”
“알았다.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와라.”
혜정은 진태의 목소리가 심상찮음을 느끼고,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걸 봐라.”
혜정은 아빠가 가리키는 모니터의 그래프 곡선을 보았으나,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에……. 그래프가 올라가고 있군요.”
“그래. 바로 그거야.”
“그래서요?”
진태는 이제 혜정의 얼굴을 보면서, 그것도 모르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보류해 두란 거 있잖아.”
“아, 그 북해산 석유 말이에요?”
“그래. 그걸 당장 팔아.”
“예?”
혜정은 순간 당황하면서, 다시 한 번 그래프를 보았다. 분명 그래프는 올라가고 있었다.
‘아빠는 맨날 노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혜정은 손진태 회장이라는 사람을 다시 보았다.
할아버지가 물려준 회사를 받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손진태는 선물과 증권업계에는 상당한 실력자로 통했다.
“아빠, 알겠습니다. 당장 처분하겠습니다.”
진태는 그런 혜정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병승이가 이만큼만 해 주면 참 좋은데…….’
* * *
준영은 이제 마지막 집에 배달을 막 끝냈다.
“하아, 오늘 일이 끝났구나. 어디 보자, 일곱 시네.”
손목에 차고 있는 낡은 시계를 준영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계와의 추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준영은 트럭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힘차게 엑셀을 밟았다. 이제 사무실로 가서 씻고 퇴근하면 되는 것이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어이, 최 기사도 수고했어. 그럼 내일 봐.”
준영은 인사를 꾸벅 하고 택배 기사 휴게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서,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왁!”
준영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두운 밤 공기속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하하하.”
깜짝 놀라는 준영의 귀에 귀여운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경이구나. 이런, 깜짝 놀랐다.”
준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새 가끔씩 옛날 꿈을 꾸곤 하는 그였다. 그리고 항상 꿈속에서는 누군가를 때리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얻어맞거나 하곤 그랬다.
“응, 오빠. 오늘은 어땠어?”
“어쩌기는, 항상 그렇지 뭐.”
준영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밤 9 시.
“오빠, 아직도 그 시계 가지고 있네?”
준영은 물끄러미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오리엔트 시계. 초바늘이 째각째각 움직이고 있었다.
준영은 선경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누가 준 건데? 뭐 좀 먹으러 갈까?”
선경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 * *
선경은 아파트 중문을 밀고 거실로 들어갔다.
“이제 오냐?”
소파에서 텔레비젼을 보고 있던 종환이 반갑게 선경을 맞았다.
“예. 아빠. 오늘 하루 어땠어요?”
“너, 저녁은 먹었냐?”
순화가 주방에서 손을 앞치마에 닦으면서 나왔다.
“엄마, 그럼요. 누구랑 먹었게요?”
“누구랑 먹었는지 내가 알게 뭐냐? 시집도 안 가고 그러고 있으니 내가 미치지.”
선경은 순화에게 혀를 낼름거리며, 소파로 가서, 종환의 옆에 앉았다.
“아빠, 준영 오빠랑 밥 먹었어요.”
종환의 얼굴이 대번 밝아졌다.
“잘했다. 어쩌고 있더냐?”
“잘 있어요. 택배 잘 하고 있어요.”
순화가 선경이 옆에 앉았다.
“잘 하고 있더냐?”
선경은 끄덕끄덕했다.
“내가 기회봐서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할 거야.”
“그래, 그래야지. 네가 최고다.”
순화는 선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종환은 선경을 보면서 함빡 미소를 지었다.
* * *
“휴, 오늘도 덥구나. 어디 보자, 주소가…….”
준영은 종로 3가를 지났다. 종각 방향으로 봉고 트럭이 휙 달려간다. 차창 밖으로 사람들이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세종로에 진입한 트럭은 광화문 쪽으로 가더니 왼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오늘도 성북동이네. 잘 사는 집은 택배도 많아.”
준영은 성북동 골목으로 트럭을 살살 몰았다. 길 양쪽으로 좋은 집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골목은 경사가 졌으며, 그리 넓지는 않았다.
택배를 배달할 집이 저만치 보였다. 준영은 길가 전봇대 옆으로 트럭을 댔다.
트럭에서 내린 준영은 화물칸 문을 열고 자그마한 상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와 보았던 집의 대문으로 향했다.
그 순간 준영의 앞 저멀리에서 순식간에 은색 자동차가 나타났다. 그 자동차는 준영이 가고자 하는 바로 그 집 앞에 멈췄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준영은 은색 벤츠만 쳐다보면서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준영은 라이터의 찰칵거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그 소리는 준영의 귀에 들리지가 않았다.
이상한 느낌이 든 준영은 고개를 들어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의 입에서 담배가 흔들거리고 있었다. 다음 순간 담배가 땅으로 떨어졌다. 준영은 그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남자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준영의 눈에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택배 상자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