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은 왜 개혁을 꿈꾸는가
한 나라의 위인은 국민의 소망을 대변한다.
일본인들은 무엇을 소망하는가?
정치가들은 어떻게 대답하는가?
일본과 우리는 경제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고도 경제 성장을 이뤘다는 점, 그 과정에서 성과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점. 국가적 지위에 비해 국민들이 가난하다는 점, 빈부격차가 심한 편이라는 점 등이 똑같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문제는 끊임없는 국민들의 정치적 투쟁으로 해결했다.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은 촛불혁명이라는 진화된 민중시위로 발전, 문화의 정치로 국가에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나라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잘 길들여진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국가의 전횡에 대해 반응이 없다. 인터넷 상에서 불만을 표시할지 언정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다만 이를 누군가가 해결해 줄 것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게 일본의 변혁, 혁신은 죽었다. 단지 소망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정치가들 때문에 일본에서는 변혁이 일어날 수 없다.
한 나라에서 인기있는 인물을 보면 그 나라의 상황을 어렴풋이 볼 수 있다. 중국의 마오쩌둥에 대한 인식을 보면 공산당 주도체제에 대한 선망, 학살과 실정에 대한 반감이 동시에 비친다. 대한민국 사람이 존경하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제독은 약간 복잡하다. 한 사람은 평화로운(?) 시대를 이어받은 문과계열 왕이며 한 사람은 불리한 전황을 극복해낸 무관, 장수다. 업적에 공통점이 없는 이 둘은 ‘삶의 방식’에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일 중독이며 둘 다 공정하고 엄격했고 둘 다 백성을 사랑하는 리더였다. 이는 한국인들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며 공정한 리더를 존경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한 집단이 선호하는 리더십의 유형은 ‘결핍’에서 나온다.
그런 리더를 따르고 싶으며 나아가 그런 리더가 되기를 원한다.
한국인이 공정하고 직무에 충실한 리더를 원하는 이유는 기적과도 같은 고도경제발전의 그늘에 숨은 부정부패와 연줄위주의 시스템이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공직자가 앞다투어 나라를 외세에 팔아먹고 나라를 되찾자는 사람들을 밀고, 고문해서 잘 먹고 잘산 역사도 있으니 ‘공정하고 책임감 있는 리더’에 대한 그리움은 거의 콤플렉스 수준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리더상이 결핍에서 나온다면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구글 트렌드로 일본인이 좋아하는 위인을 뽑아보니 ‘오다 노부나가’,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나다 유키무라’ 등이 나온다. 그러니 이 사람들에게서 ‘결핍’의 요소를 찾는 게 좋을 텐데, 주의할 점은 일본인의 경우 이 결핍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이미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한국에서 만화, 영화, 드라마를 만들 때 역사인물을 재해석하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아니 요즘도 해석의 정도에 따라서 그 콘텐츠가 망하느냐가 달린 중대사안이다. 영화 ‘나랏말싸미’가 관객들에게 비난을 받은 이유는 세종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세종 리더십의 근간을 건드리는 해석이며 대중이 절대 납득할 수 없는 창작이다. 한국에서 기본적인 ‘사실’을 건드리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
그런데 일본은 다르다. ‘사실’보다는 ‘이미지’에 집중한다. 이런 현상은 일본 기록의 특수성 때문이다. 세계에서도 탑 클래스의 기록자료 덕분에 후손들이 사실을 넘어 인과관계까지 이해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중앙정부의 공식기록 자체가 없다.
19세기 메이지 유신 전 까지만 해도 쇼균에 의해 각 지역의 영주인 다이묘가 통치하는 봉건주의 제도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각자가 알아서 썼기 때문이다. 즉 사적인 관점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적인 관점이 들어가면 논란이 발생한다. 하물며 세계가 인정한 조선의 편년체 기록도 쓴 사람이 ‘사관’이라는 ‘인간’이며 인간이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세조실록은 세조와 함께 쿠데타를 벌인 사람들이 쓴 탓인지 세종대의 충신이 역적이 되고, 단종은 무능한 왕이 되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은 아예 류성룡, 윤두수 등의 인물 평가가 정 반대이기도 하다. 자기 조상과 계파를 욕 먹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아예 시스템 자체가 편파성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기록은 봉건국가의 영주들이 지배의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록은 다이묘에게서 경제적 이익, 즉 ‘급여’를 받는 ‘유우히츠(右筆)’
가 쓴다. 자연스럽게 고용주를 우대할 수밖에 없다. 봉급주는 영주가 수시로 확인한다는 점에서 이미 이 기록은 진실이 아닌 목숨의 문제다.
이렇게 일본의 기록은 사실이 아닌 이미지를 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이미지는 ‘백성이 원하는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각색된다. 한 예로 ‘기마군단을 통솔하던 다케다 신겐’, 하지만 당시 일본에 있는 말은 조랑말 뿐이었다. 조랑말로 돌격했다간 조총과 화살의 먹이감이 된다는 것은 상식중의 상식, 설령 기마군단이 진짜로 있어도 고작해야 짐이나 옮겼을 것이다. 목책을 뛰어넘어 적을 급습했다는 기록은 그야말로 상상의 영역이다. 기록이 죄다 이런 식으로 ‘셀프’로 만들어지는 바람에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진실을 찾기 위해 여러 기록을 교차 검증하는 것이 일이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 사학자들을 고생시키는데 일조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반대급부가 있었으니 역사 위인들의 캐릭터가 강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캐릭터는 위인 선호도에 일조하게 된다.
일본 전국시대의 위인들은 캐릭터가 확실하다. 전국시대 무장 ‘다케다 신겐’은 그의 전략, 전술을 상징하는 ‘풍림화산’,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는 일본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승려집단이자 무장세력인 ‘엔랴쿠지’를 제압하기 위해 절에 불을 질러버린 비정함 덕분에 ‘제육천마왕’이라는 악명이 붙어버렸다.
그의 삶과 업적이 만화 캐릭터처럼 키워드로 정리된다.
일본 역사 교육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우선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한 역사다. 조상들의 퀄리티를 의심할 만한 우울한 이야기가 실리지 않는다. 또한 이런 역사교육조차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꽤 지적인 사람이어도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일본인이라면 전국시대 무장에 대해 잘 알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중국인이 삼국지의 위인을 잘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면 된다. 그러니 인기있는 역사 위인이 ‘이미지’에 좌우되기 딱 좋은 환경이 될 수 밖에 없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이를 잘 나타내는 인물이다. 그는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위인이며, 한국에서도 시바 료타로의 소설인 ‘료마가 간다’로 인해 널리 알려졌다. 문제는 소설의 료마와 실제의 료마가 사실상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일본의 미디어가 다루는 료마는 실존인물이 아닌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소설인 ‘료마가 간다(竜馬がゆく)’의 료마다. 물론 작가인 시바 료타로는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소설의 캐릭터는 창작의 캐릭터라면서 료마의 이름에 (龍)가 아닌 료(竜)를 쓴다.
즉 대중에게 익숙한 료마는 실존인물이 아니라
시바 료타로의 사상을 대변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런 료마가 인기를 얻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일본인이 원하는 무언가를, 결핍을 채워줄 무언가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결핍은 대체 무엇일까?
오다 노부나가와 사카모토 료마, 일본인이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구글 트렌드에서 이 두 사람을 분석해보니 ‘변혁’, ‘혁신’이 딸려 나온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혁신과 변혁을 그리워한다는 말이 될까? 우선 단어부터 정의해보자.
변혁: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것, 개혁으로 볼 수도 있다.
혁신: 잘한 일을 더욱 정진하여 발전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
일본인들은 혁신을 잘 한다. ‘카이젠(개선: 改善)’은 일본이 지금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핵심공로자다. 한국도 혁신적인 민족 소리를 듣지만 일본인에 비하면 한 수 아래다. 하지만 문제는 변혁이다. 일본 사람들은 변혁과는 거리가 정말 먼 사람들이다. 특히 근현대사에서는 이 문제가 도드라진다.
이는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배부르고 등 따시면 현실에 만족하려고 한다. 불교는 이를 지옥에 떨어진 칸타타가 목숨이 위험함에도 벌꿀을 받아먹으며 지옥탈출은 아예 잊어버린 우화를 통해 풍자한다. 즉 변혁을 하려는 사람은 무언가에 결핍을 느끼거나, 사회에서 결핍을 발견한 선구자들이며, 이 선구자들은 예외없이 사회 기득권의 거센 반발, 집단의 의식에서 벗어난 사람이라는 딱지를 짊어지고 힘든 길을 걸어가야 한다.
2019년, 한국에서 전범기업에 대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이 대법원의 전원합의체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일본정부는 대한민국을 무역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 반도체의 중요 소재 3종을 수출 규제함으로써 반도체 세계 1위인 한국의 발목을 잡았다.
이때 대중이 놀란 것은 국내 현실이었다. 일본소재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것도 문제인데 국내에 생산하는 업체가 있음에도, 세계적인 트랜드가 주요소재를 직접 자회사를 만들어 확보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일본에만 매달리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게다가 속 사정은 더 기가 막히다. 의욕 있는 실무자들이 좀 더 좋은 품질, 좀 더 낮은 가격의 제품을 연이어 발굴하고, 세계적인 트렌드에 맞는 자회사 위주의 소재공급도 상부에 제안했지만 상부는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높은 품질의 일본제에 취해 변혁을 거부해온 것이다. 괜히 잘못 썼다가 일이 터져서 승진누락, 임원계약해지에 휘말리기 싫었던 탓이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다.
변혁은 기존 시스템에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이 시작한다.
변화를 이뤄낸 사람들은 거의 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라는 변방 출신으로 당시 프랑스 군대의 엘리트 코스에선 한참 벗어나 있었다. 평상시라면 그가 아무리 공을 세워도 일정 계급 이상 승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권력을 위해 판을 뒤흔들어야 했다.
꼭 흙수저만 판을 흔드는 것은 아니다.
정복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살아남기 위해 아버지 ‘필리포스’와 싸워야 했으며 ‘징기스칸’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독살당하는 바람에 차기 족장의 자리를 빼앗기고 부족에게 버림받았다. 조선의 세종대왕도 가만히 앉아서 왕이 될 팔자의 사람은 아니었다. 형 양녕을 밀어내는 전략과 추진력이 있었기에 왕이 될 수 있었지, 가만히 양녕이 왕이 되도록 놔뒀으면 평안한 인생은 둘째 치고 그 출중한 재주 덕분에 바로 죽었을 것이다. 바츨라프 하벨 체코 초대 대통령은 다이아몬드 수저였기 때문에 공산당의 탄압을 받았고 이에 민주화 운동에 뛰어든다. 고 스티브 잡스가 경영과 혁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계기는 자기가 창업한 애플에서 쫓겨난 경험이었다. 그 전에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기 고집만 지키는 대책 없는 사람이었다.
변화, 즉 개혁은 위기를 인지하고 끝없이 고민하는 사람만이 이뤄낼 수 있다.
일본에서 변혁의 상징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았다. 오다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다이묘인 오다 노부히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2살 때 나고야성의 성주가 되었다.
이렇게 보면 아버지 덕분에 건물주가 된 갓물주로 보이겠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오다 일가는 이전에 오와리를 지배했던 '시바'가문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오다가가 신생조직이다보니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다 노부히데는 방계라 순혈주의 타령을 하는 직계들이 목숨까지 노려대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노부나가는 금수저라기 보다는 금수저를 빼앗기고 죽을 위험이 더 높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죽자 그 확률은 급격히 높아졌다. 결국 세상은 노부나가에게 살기 위해 변혁을 강요했다.
리스본 출신의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명예심이 충만하고 정의감이 강했다. 때로는 인정과 자비를 베풀 줄 알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믿지 않았으며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온갖 미신은 물론 신도 부처도 거부했다.
기존의 사회, 질서가 위협이 된다면 이에 얽매이면 안된다. 자기 캐릭터를 만들고 그 캐릭터를 위한 룰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노부나가는 어렸을 때 이를 이미 마친 듯 보인다.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겐 바보짓으로 보였다.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공부하고 세력을 키워도 살아남기 어려운 전국시대인데 그는 젊은 사람들과 씨름을 하면서 놀거나 그냥 할 일 없이 영지를 어슬렁거렸으니 당연한 반응이리라. 그러나 나중에 이 행동은 재평가 받는다. 다만 기존 사회의 시스템과 너무 달랐기 때문에 눈에 혁신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노부나가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만의 룰을 만들었다.
그가 씨름을 연 이유는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서 실력 있는 병사를 뽑기 위해서다. 얽힌 것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은 기존의 인재가 노부나가 같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을 따를 리 없기 때문이다. 할 일 없이 영지를 노닐던 행위는 지형지물파악 및 숨겨둔 비밀통로를 파악하거나 때로는 새로 만들어서 외적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한 사전 조사였다. 이것이 증명된 것이 바로 ‘오케하자마 전투’였다.
1554년 스루가의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3만 동맹군을 몰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당시 오와리의 군사는 모두 2천, 규모만 해도 15배인데 전투경험까지 따지면 차이는 더 벌어지는 승산 없는 전투였다. 결국 몇 번의 전투를 하지도 못한 채, 언덕 위에 갇혀버리고 만다. 이에 이마가와는 크게 기뻐하며 노부나가를 포위한채 잔치를 벌인다. 언덕을 둘러싼 상황인 데다 비까지 내리니 오다는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변수가 생긴다. 노부나가가 있는 곳은 예전에 봐둔 통로였고, 이곳을 빠져나가서 적의 허점을 친 후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이게 무려 이마가와의 본진이었던 것이다. 언덕위에 있었어야 할 적이 바로 자기 뒤에 나타나자 이마가와는 혼비백산하여 정예병을 이끌고 도망을 쳤지만 노부나가는 죽기 살기로 추격 이마가와를 죽였고, 이마가와의 위세에 의해 반 강제로 모인 동맹군은 맥없이 흩어졌다. 그가 추구한 변혁의 결실이 얻어진 순간이었다.
사카모토 료마는 어떤 사람인가? 노부나가가 그나마 기록이 남아있는데 반해 료마는 기록자체가 부족하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가 기록을 남겨야 할 시스템에서 벗어난 비주류였음이 확실해진다. 사람들이 소설의 ‘료마’를 잘 기억하는 이유다.
료마의 가문은 상인 집안으로 ‘사카모토’는 돈을 주고 산 무사계급이다. 민주주의 국가를 표방한 오늘날도 신분의 차이가 존재하는 일본,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돈으로 무사지위를 산 사카모토 가문은 하급무사에게도 멸시 받는 최하급 무사였다. 이런 환경에서 료마의 관심은 자연히 무사로서의 삶 보다는 상업에 쏠렸다.
당시 일본은 미국 페리호의 강제 개항을 기점으로 사회 시스템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고 에도 막부와 죠슈, 사쓰마(훗날 조선을 침공한 이토 히로부미, 오늘날 아베 신조 내각의 근거지다)가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막부는 이들을 온갖 방법으로 제어하고 있던 것이다. 료마는 이런 상황을 이용, 에도(오늘날의 도쿄)에 상경하자마자 ‘해원대' 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당시 막부에게 무역봉쇄를 당한 죠슈에게 무기를 공급해주었다.
봉쇄당하지 않은 사쓰마를 통해 무기를 들여와서 이를 죠슈에게 공급, 막대한 차익을 남긴 것이다. 이렇게 그는 돈도 벌면서 죠슈와 사쓰마를 중개하는 핵심인물로 성장했다.
이렇게 입지를 잡은 료마는 기존 질서를 없애는 변혁이 자신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변혁의 첫장애물은 기존의 권력자인 에도 막부였다. 그래서 에도 막부가 죠슈, 사쓰마를 정벌하려고 하자 이들을 중재 '삿초동맹'을 제안 양 세력을 연합하게 했다.
이들의 연합은 이미 권위가 사라진 막부를 위협하는 불길이 된다. 료마는 이 불길을 지피기 위해 료마는 막부의 권력을 일본의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골자의 ‘대정봉환'도 기획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을 옭아매는 기존 사회를 부수는 변혁에 성공했다.
그는 모든 것이 파격이고 변혁이었다. 당시 사무라이의 복장인 ‘하카마’는 풀을 먹여서 각을 잡아 입는 옷으로 그 각이 사무라이의 격을 나타내는 옷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무라이들이 칼각에 생명을 거는 마당에 그는 각은 고사하고 주름진 하카마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실리에만 집중한 것이다. 이후 31세에 암살당할 때까지 그는 비주류로 살면서 변혁과 혁신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고 했다.
앞서 말했듯이 ‘만족스럽지 않은 현재’를 바꾸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변혁은 고사하고 혁신조차 기존 기득권의 이익 앞에 무너지는 게 현실이다. 이는 한국사람들도 크게 공감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여기서 일본인과의 공감대가 생긴다.
일본인들이 변혁을 상징하는 위인에 열광하는 이유는
지금 일본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에서 변혁은 굉장히 힘든 과제다. 사회 시스템이 너무 탄탄하고, 이를 부수는 것 가체가 터부시되다 사회 유동성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현재 시스템을 더 잘 굴러가게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그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인데 덕분에 시스템이 정해준 계층(신분, 역할, 삶의 질)을 벗어나는 것이 극히 힘들다.
이를 잘 드러내는 사건이 있다. 이번 반도체 분쟁의 중심에는, 한국이 세계 1위인 반도체의 꽃 ‘낸드 플래시 메모리(Nand Flash Memory)’가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걸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은 한국이 아닌 일본 도시바의 연구원 ‘마스오카 후지오(舛岡富士雄)’박사였다. 이 세기의 발명 덕분에 우리는 스마트폰에 음악과 영화 책을 넣고 다니고, 디지털 카메라에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왜 이런 세기의 발명의 수혜를 삼성이 입었을까?
도시바는 낸드 플래시가 가져올 변혁의 가치를 몰랐다
변혁 그 자체를 거부했다.
도시바는 당시 시장의 트렌드인 ‘Dram(동적램)’의 혁신에만 관심이 있었고 새로운 시장을 창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변혁을 차단하기 위해 마스오카 박사를 부하 한 명 없는 부서의 부장으로 승진시켜 좌천시킨 후, 낸드 플래시의 권리, 개발자료 등의 모든 것을 우량 고객이었던 삼성에게 공짜로 넘겨버린다. 일본의 추격자로써 만족할 수 없었던 삼성은 이 기술의 미래가치를 깨닫고 새로운 반도체 산업영역에 뛰어드는 변혁에 성공 오늘날의 영광을 이뤄냈다.
이는 도시바와 삼성의 입지를 바꾸는 단초가 된다. 도시바는 삼성에게 밀리다가 결국 삼성의 후발주자인 ‘하이닉스’에게 매각 당하는 처지가 된다. 이런 식으로 도시바만이 아니라 소니, 샤프, 파나소닉도 비슷한 이유로 무너져버렸다
자기가 힘을 가져도 변혁하지 못하는 것이 일본사회임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이것이 30년 불황의 원인이다.
일본은 기존의 시스템을 개선하거나 개량하는 혁신 능력은 세계 최고다. 남이 엉터리로 쓴 글을 최치원의 눈물로 압록강을 채울 명문으로 바꿀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명문을 창조하는 것도 잘한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명문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은 잘 못한다. 역사적으로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 때문에 기존 시스템에서 벗어날 경우 타격이 크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안정된 사회 시스템이 남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강요하며
다른 경험을 할 기회를 막는다.
이렇게 변혁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고가 완성된다.
문제는 변혁을 꿈도 못 꾸는 사회는 외부충격에 약하다는 것이다. 250년간 쇄국정책이라는 새장 속에서 갇힌 일본이 개항을 하게 된 계기는 미국의 흑선이 쏜 공포 몇 발이었다. 너무 온실속의 화초처럼 자란 탓에 외부 충격에 비정상적으로 약해진 것이다.
이 나라 사실 온갖 사회현상을 시스템과 안정으로 설명 가능한 나라다. 그래서 아무리 사회 구성원이 일본 사회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해도 변혁, 혁신이 잘 안 일어난다. 그보다 시스템이 중요한 문화니까. 그리고 시스템과 매뉴얼이 무너졌을 때 필요이상으로 당황한다. 그런데 왜 그들은 노부나가와 료마를 좋아하는 것일까?
왜 그들은 변화를 갈망할까?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본경제를 한 마디로 말하면 ‘시한부 인생의 호랑이’다. 국가 부채는 GDP의 253배, 1경 4천조원(1300조엔)이라는 전무후무한 금액에, 미래는커녕 원전을 통제 못해 수도 도쿄까지 피폭된 상황이다. 국채로 버티는데 국채 성장률이 -0.2%라 더 이상 팔리지도 않는다. 나라가 국민에게 진 빚조차 갚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한때는 나라 취급도 안 하던 한국이 바싹 쫓아오는 것도 모자라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미래를 주도하고 있다. 게다가 옆나라 중국도 바싹 성장하고 있다. 무언가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럴 조짐이 도통 안보인다. 이게 우리 입장이라면 얼마나 절망스럽겠는가? 성장할 수 없는 국가에서 사는 것은 국민의 불행이다.
예전 일본인은 변혁을 통해 황금기를 얻은 경험이 있다. 그래서 변혁을 갈망한다.
변혁이 어려운 일본, 그런데 얄궂게도 그들은 변혁을 통해 급성장한 경험이 있다. 이게 그 변혁을 그리워하는 원인다. 문제는 그 변혁의 성질이다. 일본의 경제성장 역사에는 꼭 희생양이 있었으며 그 희생양은 대부분 우리 나라다. 왜구야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은본위제의 중심에서 급격하게 성장한 계기는 조선에서 빼돌린 은(銀)제련술이었다. 임진왜란때는 도공 등의 기술자를 납치해가서 전 세계에 일본도자기를 팔았고, 메이지 정부는 조선을 침공함으로써 일본내의 부랑자를 청소하고 부족한 식량을 해결해서 '다이쇼' 라는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2
차 대전 패전국으로 무너져가던 나라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한다..
성공해 본 사람은 자신을 성공시켰던 성공공식에만 의존하다 무너진다.
일본 국민들은 암울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변혁을 원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일본의 극우세력이 한국 전쟁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외치는 것을 대놓고 부추긴다. 이 중심에는 사실상의 일본을 통치하는 일본회의가 버티고 있다. 현재 정권을 장악한 일본 회의는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되찾겠다며 헌법을 개정하고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한다고 한다. 물론 국제사회 질서상 대놓고 미사일을 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 자체가 한국에게 위협이며, 군비확장으로 인해 성장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이런 행보 자체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100여년전 국제사회에게 이익을 안겨주고 조선을 집어삼킨 경험이 있으니까.
물론 꼭 전쟁만이 그들의 변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충격을 디딤돌 삼아 변혁을 시도, 성공한 역사가 있다. 한국전쟁 이후 관성적으로 성장하던 일본은 또다른 위기를 맞는다. 1971년에 국제통화위기와 1차 오일 쇼크가 연이어 터진 것이다. 기름을 수입할 수 없어서 제조업이 전면 멈춰버린 것은 물론이고, 거리의 네온사인을 모두 끌 정도로 상황이 심각했다. 온 국민이 체감하는 위기라 할 만하다.
이때 그들이 고른 변혁은 당시 미국이 주도하던 3차 산업이었다. 반도체와 관련 장비, 소재에 도전한 것이다. 이 도전에 성공함으로써 일본은 또 한 번 도약했으며, 일본산 소재와 반도체는 엔화가치를 의도적으로 절하함으로써 날개를 달게 된다.
이렇게 일본은 마이크로 전자공학 산업의 총아로 떠오른다. 미국, 유럽보다 낮은 인건비로 만든 일본제 반도체, 가전제품은 절하한 엔화로 인한 가격경쟁력까지 업고 전 세계를 장악한다. 세계무역을 위한 시스템이 없던 시절이라, 일본의 성장은 파죽지세였다. 일본이 미국을 제칠 수도 있다는 분석이 미국에서 나온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당연히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은 상당수의 제조설비를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을 무시할 수 없었고 실제로 미국에게 휘둘렸다. 당시에는 ‘WTO’도 없었고 ‘GATT'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던 시기라 미국은 일본에 대한 관세압박은 물론 일본산 제품의 시장 점유율까지 마음대로 정했다. 일본이 이에 반발하면 온갖 압력을 가해 무마시켰다. 훗날 일본의 경제가 붕괴된 사건도 미국의 압력에 의해 부채를 무리하게 늘린 것에 원인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부채를 없앤 후 또다른 도전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부채를 경제 시스템에 편입해버린 것이다. 쉽게 말하면 빚을 다 갚고 열심히 벌어서 삶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빚 돌려막기로 살아가는 길을 택한 셈이다. 이렇게 일본의 경제 시스템은 부채와 함께 돌아가게 되었고 부채를 갚을 한 방을 위해 공적자금을 투자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변혁없이 관성적으로 운영되었기에 시스템은 파국을 맞는다. 결국 일본은 훗날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리는 참사에 직면한다. 경제는 붕괴하고 막대한 공적자금은 허공으로 날아갔으며 버블시대에 높아진 물가와 공공인프라, 복지제도는 수입이 줄어든 서민을 압박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적인 국가의 현실이
일본인에게 변혁을 꿈꾸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1990~2000년을 ‘잃어버린 10년(失われた10年, 平成不況)’이라고 부른다. 성장과 발전이 없는 쇠락의 시기, 그리고 혹자는 2012년까지의 정체를 포함해서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20년간 과거의 영광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정도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억만장자를 꿈꿀 수 있던, 억만장자가 손에 닿을 거리에 있던 버블시대는 올 기약이 없다. 사람은 안정을 꿈꾼다. 단 그 안정이란 불완전한 오늘이 아닌 영광스러운 순간이다.
일본인에겐 그것이 과거의 버블경제고
일본이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히게 된 계기가 된다.
한국인은 이런 절망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IMF 외환위기라는 비슷한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일본사회가 버블경제붕괴를 기점으로 변한다면 대한민국 사회는 97년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나눈다. 그 전까지는 일단 사회에 나오면 어디든 취업이 되고,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최고 대기업인 현대자동차의 경쟁률이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최대 수십만대 1인이다. 꼭 그런 직장에 가야 하냐고 묻지 마라, IMF 외환위기이후 대한민국의 상당수 중소기업은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돈도 못 버는 곳이 되어버렸으니까. 이후 한국의 취업난과 서민경제의 흐름을 보면, 일본인의 상실감은 충분히 공감이 간다.
변혁을 원한다는 것은 현재의 생활, 삶에 불만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일본인들의 이상은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20년전 경제 호황기이다. 그래서 노부나가와 료마같이 파격적인 풍운아들이 사랑받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정치는 이런 사람의 반응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정치는 유권자가 원하는 것을 보여주는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버블붕괴이후 일본 정치는 굉장히 불안정해져서 대부분의 총리가 1년을 버티지 못했다. 경제 책임론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단 두 사람 장기집권한 사람이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아베 신조 총리다. 이 사람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1. 총리 취임전에는 친한파 행보를 보였으며, 극우행보를 보이지 않았다.
2. 취임후에는 전에 보이지 않던 극우 노선을 추진했다.
3.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다.
즉 정치가로써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신했음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변신에는 정치가로서의 이미지 메이킹도 포함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괴짜(変人), 일언거사(一言居士)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파격적이고 행동 하나하나가 괴짜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가 이런 이미지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 바로 노부나가다. 노부나가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인 ‘혼노지’의 저자 ‘이케미야 쇼이치로’가 붙여준 별명인데 이를 노부나가의 인기와 잘 조합하여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한 케이스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비주류 계파인 고이즈미는 총리에 당선, 임기내내 파벌정치를 타파하는 혁신에 주력했다.
그는 시스템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는 리더였다.
이렇게 그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 덕분에 주류 계파가 아닌 정치인도 총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이 있다. 바로 ‘아베 신조’ 총리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활용한 캐릭터다.
이 그림은 2019년 7월, 참의원 선거용 이미지로, 인기 게임 파이널 판타지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아마노 요시타카(天野喜孝)’에게 의뢰해서 그린 그림이다. 아마노 화백은 인기 유신지사를 아베 내각의 의원들과 매칭시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이때 아베 총리가 활용한 것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다. 그가 가진 변혁, 혁신의 이미지를 활용, 정책 캐치프레이즈를 강조한 것이다.
그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부흥’이다.
그는 일본을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려 놓겠다고, ‘부흥’시키겠다고 했다. 일본 사회는 그 ‘부흥’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지지율과 의석이 이를 증명한다. 단 나는 묻고 싶다.
과거에 대한 고찰, 근본적인 변혁없이 과거의 영광만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현재 일본 사회의 모순을 궤뚫는 질문이 아닐까?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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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