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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욕의왕 Feb 09. 2016

명절이 싫은 남자

나는 '아빠 안녕?' 하는 마음으로 절을 했다.

집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면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빨간 숫자가 달력에 연달아 찍혀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연휴가 좋아도 명절을 좋아할 수가 없다. 옆자리에 앉은 누나도 잠을 자다가 깨다가 가끔 한숨을 내쉬는 것 보니 명절은 명절이다.

무언가 싫어진다면 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찾아내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나 노력이 있다면 사실 진짜 싫은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진짜 무력함을 느끼게 될 때는 마음을 내려놓을 때이다. 입을 닫을 때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티브이를 바라볼 때이다. 기름 냄새가 채 사라지지 않은 거실에서는 아빠의 빈자리만 눈에 들어왔고, 나는 아빠 안녕. 하는 마음으로 절을 했다.

우리 집은 제사를 많이 지낸다. 나는 아버지 제사를 제외하고는 참석하지 않는다. 명절에도 아침 7시에 눈을 뜨면 장소를 바꿔가며 4번의 차례를 지낸다. 얼굴도 보지 못한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어머니들과 할아버지 형제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절을 하다가 보면 오전 11시다.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친척들은 남보다 못하다. 우리가 같은 성을 쓴다는 것과 나와 같은 성을 쓰는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같은 공간에 있을 이유 같은 건 오로지 절을 하기 위해서다. 절에 다니는 큰아버지는 교회를 다닌다고 절을 안 하는 오촌 당숙과 조카들에게 쓴소리를 했다. 남보다 못하다.   

아버지를 위한 차례는 내가 제일 먼저 절을 하는 것 이외는 다른 것이 없다. 너무 지겨워서 아빠에게 고작 일 년에 몇 번 하는 인사를 아무 생각 없이 하게 되는 것이 싫다. 음식을 하느라고 지친 엄마 얼굴 위로 말이 많은 작은아버지의 설교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채울 때 나는 상 머리에 앉은 아빠를 상상한다. 아빠 정말 거기 있어? 있어도 없어도 없다. 아버지의 제사에 쓰인 지방을 태우면서 몰래 담배를 피운다. 아빠는 재가 되어 날아가는 그곳에 있다고 생각해야지. 이러면 없어도 있다. 아빠 거기에 있지?  

아빠가 거기에 있든 없든 아마 엄마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큰 상을 차려놓고 술을 따르고 절을 할 것이다. 조율이시나 홍동백서 같은 건 아마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지 100년이 채 안 됐을 것이 분명한 우리 집과는 상관도 없고 그런 걸 따질 이유도 없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이런 행위는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의례라고 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아직 살아계신 할머니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작은아버지를 위해, 명절 아침 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가고 싶지만 참고 있는 엄마를 위해. 모두를 위해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한다. 모두에게 있을 모두의 말들이 침묵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또 명절이 지나간다.      

나는 명절이 싫다. 아빠가 슬프게 떠오르는 고향의 집이 싫다. 엄마가 다니는 성당에 따라가 일찍 미사를 드리고 아침을 먹으며 아빠 얘기를 하고 싶다. 점심을 먹고 성묘를 다녀온 뒤, 엄마 누나랑 웃으며 우리 얘기를 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명절이 좋아질 것 같다. 담배 냄새가 난다고 잔소리하는 엄마 이야기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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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동안 담배를 사는데 가장 많은 돈을 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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