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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우뚝 May 17. 2020

자발적 호구가 됩시다

바닷속 하얀숲의 비밀

    녹고 있는 위태로운 빙하 위의 북극곰, 면봉을 꼬리로 감고 있는 해마, 플라스틱 병뚜껑을 집으로 삼은 소라게 사진 등을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찰나의 경각심과 미안함이 찾아오지만, 테이크 아웃한 일회용 잔에 든 커피를 마시며 이내 잊어버린다. 나도 그랬다, 직접 내 눈으로 그 현장을 목격하기 전까지.

(좌) 치약뚜껑을 집으로 삼은 소라게, (우) 면봉을 꼬리로 감은 해마 (출처: 좌측 국민일보, 우측 Justin Hofman, Sea Legacy

     내가 살고 있는 동티모르는 국토가 바다로 둘러싸인 섬나라다.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며, 나머지는 석유산업, 서비스업, 관광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수익은 대부분 석유산업에서 발생하지만, 동티모르 정부는 차세대 지속 가능한 산업으로 관광업 육성의 꿈을 꾸고 있다. 그들은 제2의 발리가 되겠다고 하지만, 달러화를 쓰고, 물류가 제한적이며, 제조업이 전무한 이 나라가 고품질 저가 서비스업이 발달한 발리를 따라잡기엔 한세월도 모자라 보인다. 대신 때 묻지 않은 자연경관은 동티모르만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데, 최근 들어 이 마저도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했다.

동티모르의 유일한 Tibar에 있는 쓰레기 처리장. 대부분의 쓰레기를 소각하며, 주위엔 가축들이 돌아다닌다. (사진: Ali MC)

    동티모르 스쿠버 다이빙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이뤄지는 보트 다이빙이 아니라, 해변에서부터 장비를 매고 걸어 들어가는 비치 다이빙이 주를 이룬다. 주거지와 인접한 곳에서 다이빙을 하게 되면, 등허리를 압박해오는 스쿠버 장비의 무게보다 해변으로 밀려오는 쓰레기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제대로 된 폐기물 처리시설이 없어 버려진 쓰레기는 비가 올 때마다 바다로 떠밀려 나가고, 다행히 수거된 쓰레기도 모두 소각된다. 당연히 분리수거는 괜한 수고다.


    물속은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위장 속 음식물 찌꺼기처럼 인간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연산호의 손발을 묶어버린 폐그물과 그 사이를 무심하게 지나가는 물고기 떼를 마주했을 때, 조류 속에서도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그 광경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산호 그 자체도 동물이지만, 산호를 물고기들이 사는 아파트 같은 것이라 치자. 누가 내 집에 커다랗고 흉물스러운 쓰레기를 가져다 두었는데, 이를 치우지 못하고 함께 살아야 한다 생각해보면, 더 이상 남의 일 같지 않다.

스쿠버 장비를 매고 걸어들어가는 비치다이빙이 보편적인 동티모르

    자연에 민폐 끼치기 않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국에 휴가를 갔다 발리를 거쳐 동티모르로 돌아오던 길, 면세점 한 귀퉁이에 팔리지 않고 쌓여있던 산호 보호용 선크림을 보았다. 보통 선크림보다 3배나 비쌌는데 큰 맘먹고 구매했다. 다이빙을 하기 전, 자랑스레 산호 보호용 선크림을 꺼내 바르는데, 웬걸 석고를 얼굴에 바르는 것 같았다. 무겁고 두껍고 기름진 선크림에 얼굴은 석고상처럼 하얗게 변했고, 친구들은 깔깔 웃었다. 왜 팔리지 않고 쌓여있었나 십분 이해가 갔다.

발리 면세점에서 구매한 산호 보호용 선크림. 이렇게 다 합쳐서 100불이 넘는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선크림은 화학적으로 자외선을 차단하는 유기자외선차단제로, 산뜻하고 흡수가 빠르다. 유기자차 선크림에는 옥시벤존과 옥티노세이트가 함유되어 있는데, 이 물질들은 산호를 하얗게 죽이는 ‘백화현상’의 주범이다. 한편, 광물에서 추출한 무기물질을 이용해 만든 무기자차 선크림의 경우 화학성분이 적은 대신 얼굴이 하얗게 뜨는 백탁 현상이 심하다. 나아가, 산호 보호용 선크림은 입자가 큰 논나노 제품이라, 마치 석고와 같이 두껍고 무겁게 발린다. 피부가 예민하지 않고, 기능만 따진다면 당연히 유기자차 선크림을 선택하겠지만, 산호에 씻을 수 없는 화학물질을 바르는 것보다 세수하며 씻어낼 수 있는 석고상이 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자연 입장에서 비유하자면, 유기자차 선크림은 지워지지 않는 유성펜, 무기자차 선크림은 지워지는 수성펜과도 같다.

백화현상으로 인한 산호의 사막화 (사진: 그린피스)

    다이빙이 끝나고 햇볕에 몸을 말리며 차문 유리를 거울삼아 보는데, 하얗게 붙어 있던 선크림이 많이 씻겨나갔다. 아무리 밀착력 좋은 선크림이라도 물에 녹아 흩어진다 생각하니, 아찔하기도 하고,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얗게 변한 내 얼굴을 보며 깔깔대던 다이빙 친구들도 이제는 함께 산호 보호용 선크림을 바른다. ‘친환경 영업’의 빛나는 성과다.


    늘 유유히 손 흔들어주는 연산호와 인어공주 동화 속 바다를 연상케 하던 알록달록한 경산호가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길 바란다. 그래서 무겁고 답답하게 발리는 선크림을 3배 가격을 주고 산 ‘바보 같은 소비’가 나는 오히려 자랑스럽다. 하와이는 유기자차  선크림을 2021년부터 금지한다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산호 보호를 위한 제도적 움직임이 나타나기까지, 우리 한번 산호 보호용 선크림을 사용하는 ‘자발적 호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아직은" 아름다운 동티모르의 바닷속 (출처: Compass D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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