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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자 곁 May 29. 2022

초록 지향

週刊 |  울창한 독백 001


週刊 | 울창한 독백 001

초록 지향



1. 초록을 피우기 위해 무채색 계절을 건너온 사람들


주말, 몇 년 만에 L을 만났다. 전보다는 훨씬 건강해진 얼굴. 약속 장소였던 서울숲 지하철 출구 앞에서 서로를 얼싸안았다. 시시콜콜한 대화 속에서, 나는 직감했다. 오늘 우린 어쩌면 꽁꽁 잠근 서랍을 뜯어 바닥에 쏟아낼 것이라고. 그리고 쏟아낸 것들 속에서 하나하나 의미와 기억을 찾아 이야기할 것이라고.


공원을 걸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몰린 인파. "서울 올라와 정말 놀란 건 어딜 가나 사람이 많다는 거였어."라며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L의 표정은 귀엽기만 했다. 흐린 하늘이었지만 5월의 더위는 생각보다 짙었다. 숲은 생경하리만치 다채로운 녹빛을 지니고 있었고, 군데군데 다채로운 꽃들이 피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도 있었다. 얼굴을 내밀며 여기저기 구경도 하고, 서로의 얼굴을 정성 다해 바라보기도 했다.


우리는 어떠했나. 이른 열기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발바닥이 저려오는데도 서로의 목소리에 맞춰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L은 내가 사진 찍는 것을 기다려주거나 함께 풍경을 담아 애인에게 보내기도 했다.


잘 지냈니.

응. 너 덕분에.


친구의 이마 위로 하얀 햇빛 한 줌이 부서져 있다. 우린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려 바람에 흔들린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넘나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2. 나는 나의 초록을 쓴다


누군가 내가 소셜에 나열한 글을 읽고 초록보다는 푸른색이 느껴진다고 감상을 남겼다.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내 글이 전달되는 순간, 굴절되기 마련이니까. 당신이 푸른 색채처럼 느껴졌다면 그것 또한 맞다. 바다를 위에서 바라볼 때 투명한 푸름이라고 생각했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면 탁한 녹색이 있고, 바다의 틈을 조금 더 파고들다 보면 자줏빛이. 더욱더. 심연만큼 파고들면 잿빛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저 나의 정체성이 초록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 것일 뿐. 성장하려는 모든 이들에 대한 환희로.


L은 자신의 진심이 일그러진 형태로 잘못 전달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고민이라고 한다. 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말했다. 우리는 타인의 기분보다 먼저, 우리의 기분을, 자기 자신을 더욱 배려할 필요가 있었다. 굴절되어 누군가에게 닿은 것보다, 자신에게 반사되어 닿은 것을 살펴야 한다고.






3. 초록한 춤


사월과 오월 사이의 방황을 견디고 나서, 침대에 드러누워 골똘히 천장을 노려보다가 불현듯 다짐했다. "숲을 보러 가야 해."라고. 아마도 나는, 어떤 강인한 힘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세월을 견딘 힘. 높이뿐만 아니라 기어코 양팔을 벌려가며 확장하는 오기. 깎이고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위를 향하는 다짐. 몸을 죄여 오는 검붉은 흙을 뚫고 아래로 깊어지는 뿌리. 그리고 눈부시게 빛나는 초록의 이파리. 바람 불면 제 몸 기꺼이 뒤집어 온 몸으로 바람을 맞이하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파르르 몸 떠는, 춤사위 같은 노력을. 꼭 만나고 싶었다.





4. 오월의 목격담 1


다시 돌아와,

산책하며 친구는 그간 있었던 일을 천천히 내게 전했다. 자신은 변명이라 했지만, 나는 생존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너는 살았고, 나도 살았어. 라며 대화를 끝냈다. 조금 붉어진 눈가에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숲에서 강으로 가는 다리 위에 나는 걸음을 멈췄다. 초록이 분출되는 장면. 고대하던 풍경을 만났기에.


이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왜?

그냥, 저 강렬한 힘이 좋아서. 정돈되고 반듯하게 화분에 심어져 있는 나무가 아니라, 생명이 터질 것 같은 거. 그런 걸 너무 보고 싶었어.


생명을 치열하게 연마한 듯한 풍경에 잠시 말을 잃었다. 번쩍 정신이 들고나서야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것도 잊고서 셔터만 눌러댔다. 전문적으로 사진을 잘 찍어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게 아닌, 내가 드디어 목격했음을 나에게 남기고 싶었다.




5. 오월의 목격담 2




6. 초록은 힘이 세다

초록을 선망하는 만큼, 내 이면에는 분명 다른 색이 있을 것이다. 혹은 같은 녹색이 있다 할지라도 질감과 결, 촉감이 다른 초록이 있을 것이다. 축축한 초록. 날카로운 초록. 크래커 같이 연약한 초록. 뭉개진 초록이.


조금은 지친 몸을 지하철에 집어넣어 집으로 향하는 길. 기댈 곳이 마땅치 않았다. 힘듦을 벗어나려 오늘의 이것저것을 떠올린다. 대화, 대화 공백을 채우는 침묵, 손짓들, 일렁거리리는 나무들, 흙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던 노란 원피스를 입은 아이, 학생들의 노래, 날지 못한 비눗방울, 돗자리 위에서 껴안고 자던 연인, 푸른색을 띤 보스턴 고사리 군락. 그리고. 생존을 향한 위로가 순서대로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음이 잘 허무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상처가 여무는 게 느린 사람일수록, 생존을 향한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반면에 삶에 대한 허무가 짙을수록. 초록을 선망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초록은 힘이 세다. 초록을 위하는 마음과 향하는 시선 모두. 우리의 초록은 쉬이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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