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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지 Jul 23. 2020

청소를 지지리도 못하는 여자

대학생 때 무라카미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소설 속 인물의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면모를 동경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자아상은 하루키 소설 속의 인물을 닮아 있었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마라토너처럼 성실하게 삶에 임하는, 보이는 것보단 속을 다지는데 집중하는 사람

그런데 문득 하루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특유의 여유가 시공간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시간에 적당한 공백을 두고 있었고, 정갈하게 정돈된 공간에 거주했다. 만약 이들이 어지러운 공간에서 바쁘게 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과연 마음에 여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결말이 다 바뀌어버릴 정도로, 그들의 삶은 혼잡스럽고 정신없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이상과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내 일상을 지탱하는 시공간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보기로 했다. 오전엔 조금 더 일찍 일어나 따뜻한 차를 우려내며 하루를 시작한다. 차를 마시는 데 집중하면서 불필요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가 시간엔 주로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다. 퇴근 후 운동을 마치고 돌아와 영화 한 편이나 책을 보면 시간이 알맞아서 좋다. 요즘엔 고전 작품에 빠져있다. 주말에는 H와 집 대청소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른 아침, 베란다 창을 활짝 열어젖히면 상쾌한 공기가 집안을 훑고 지나간다. 물기가 마른 그릇을 찬장에 넣고 청소기를 돌린 다음, 손걸레로 집 구석구석 먼지를 닦는다. 욕실 타일 사이를 브러시로 씻고, 거울에 튄 물자국은 마른 헝겊으로 닦아 없앤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간 집을 보고 있으면 마음도 정돈되는 기분이 든다. 청소는 시간을 들인 만큼 정직하게 결과로 보여주는 노동의 산물이라 좋다.


개뿔, 이건 다 뻥이다 뻥.

여기까지는 내 이상 속의 일상이었다. 사실 내 일상은 이상의 그림자도 따라가지 못할 먼발치에 존재하고 있다.




오늘도 역시나 늦잠을 잤다. 시간을 보고 히익! 소리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옆에서 자던 H도 덩달아 놀라고 미간을 찌푸린다. 젠장, 알람 소리는 대체 왜 안 들리는 걸까. 누워서 숨을 고를 몇 초의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화장실로 뛰어가 건조한 눈을 힘겹게 끔뻑거리며 거울을 봤다.
‘머리는 안 감아도 되지 않을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침 이를 도와줄 ‘드라이 샴푸’가 눈에 들어왔다. 뿌리기만 하면 기름진 머리가 뽀송해진다는 비장의 아이템을 개시할 때가 온 것이다. 과감하게 드라이 샴푸를 뿌린다. 칙, 치이이익.

“........”

잠깐 거울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샴푸를 뿌린 정수리가 뽀송해지긴 했다만 백발이 된 것이다. 깜짝 놀라 샴푸 스프레이에 적힌 글을 들여다보니 30cm 정도 거리를 두고 분사하라고…. 허옇게 샌 정수리를 여러번 털어보았지만, 여전히 백발이구나. 휴, 덕분에 결국 머리를 감기로 한다. 애초에 그냥 머리를 감았으면 좋았을 텐데. 무튼 고개를 숙여 샴푸를 헹구고 있으니, 하수구 위 머리카락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밤엔 저 머리카락을 꼭 치워야지..’ 며칠째 생각으로 그치고 있지만, 생각할 때만큼은 진심이다. 진짜로.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닦은 후, 입을 옷을 고르러 옷방에 들어갔다. 

아…. 여기가 동묘 구제시장이었던가. 내 옷장은 지지난 계절에 멈춰 있고, 급히 꺼낸 제철 옷더미는 의자 위가 제자리라 착각한 채로 이 계절을 지내는 중이다. 일주일 전, 나는 옷방을 정리하고 말겠다는 불굴의 의지를 다지며 H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나 오늘 옷방 치운다. 안 치우면 세계 최고 머저리에다가 니 부하임!”
나는 다음날 세계 최고 머저리 겸 H의 부하가 됐다. 아니, 어젠 바닥난 에너지를 끌어모아 썼더니 집에 오자마자 널브러져서…. 사실 다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옷방을 꼭 치우리라 재차 다짐한 나는, 집을 나서며 H에게 말한다.
“나 퇴근하고 옷방 꼭 치울게. 이번에 안 치우면 삼만 원 드림!”
돈을 걸어야 스스로도 경각심을 갖고 정리를 할 것 같아서 이런 다짐을 해보았다. 나는 다음날 H에게 삼만 원을 이체했다. H는 돈 주는 머저리 부하가 한 명 생겼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H의 실망 섞인 쓴웃음을 보며, 같이 사는 그를 위해서라도 방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내 남편이지만, 하우스메이트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짐을 한다.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이다.
“오늘은 진짜 치울게. 진짜로... 안 치우면 오만 원….”
그날 밤, 나는 드디어 정리를 시작했다. 스스로도 오만 원은 좀 아까웠나 보다. (하긴, 커피 열 잔 값이라고.)
 
 이 얘기를 동생에게 했더니 동생은 “누가 안 시켜도 치우겠다고 다짐도 하고, 심지어 진짜 치우기도 했네? 현지 사람 다 됐다!” 하며 깔깔깔 웃는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정리정돈을 지독하게도 못했고, 제자리에 물건을 놓지 않아서 하루 종일 뭔갈 찾아 헤매곤 했다. 어쩌면 내겐 애초에 정리의 DNA가 없었던 거 아닐까 싶기도 할 정도다. 그런 날 잘 아는 동생은 내가 기특하댄다. 맙소사.


나는 오늘도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H에게 내 자신과 돈을 걸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언젠간 나도 하루키의 소설 속 인물처럼, 내 이상 속 자아처럼 사는 날이 올까? 부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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