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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지 Aug 05. 2020

새집보다 오래된 집이 좋았던 이유

나의 첫 신혼집은 여행조차 가본 적 없었던 도시, 대전이었다. 당시 H의 직장이 대전에 있어서 나는 이곳에서 1년 반을 살게 되었다. 우리는 시 외곽에 위치한 아파트를 배정받았다(H의 직장에서 숙소가 제공되었다). H는 처음 이 집을 마주하고 대단히 실망했다. 만약 내게 자취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도 H를 부여잡고 울었을지도 모른다. 연두색 바탕에 자주색 꽃이 큼직하게 들어간 벽지, 체리색 찬장, 부엌의 자주색 타일. 집에 웬 체리색과 자주색이 이렇게도 많은 건지. 심지어 방문엔 아이들의 크레파스 낙서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나와 H는 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사나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낙담할 순 없지! 나의 제법 오래된 자취 경험은 상황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주었다. 나는 자신감 있는 말투로 H에게 말했다.

“누나만 믿어! 살고 싶어 지는 깨끗한 집으로 바꿔 줄테니까!”(나름 한 살 연상임)




드디어 시행착오를 겪으며 깨달아 온 자취생의 짬을 발휘할 때가 왔다! 이때까지 셀프 인테리어를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바로 페인트였다. 벽지나 장판은 비교적 큰 샘플(A4 2배 크기?)을 보고 선택할 수 있지만, 페인트는 작은 컬러칩만 보고 골라야 하기 때문에 유독 어려웠다. 이전 자취방 문에 칠할 페인트를 그렇게 고른 적이 있었다. 컬러칩을 보고는 분명 은은한 소라색인 줄 알았는데, 큰 문을 다 뒤덮고 보니 병동 어딘가에서 발견할 법한 푸르고 음산한 컬러가 구현된 것이었다. 문을 볼 때마다 머리칼이 쭈뼛 서는 듯한 경험을 여러 번 하니, 내겐 작은 컬러칩만 보고도 실물에 가까운 전체 문 컬러를 예상할 수 있는 눈이 생겼다.

크레파스가 잔뜩 묻은 방문을 페인트칠하기 위해, 가든파이브 안에 위치한 문고리닷컴 매장에 갔다. 심플하고 하얀 컬러의 방문으로 칠하기로 합의 후, H는 수많은 컬러칩들을 쭉 둘러보더니 왼쪽 상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문 컬러는 그냥 깔끔하게 흰색으로 하자. 이거 하면 되겠네! 1번!”

우리는 종종 이 단계에서 실수를 한다. 과거의 나 또한 그랬다. 만약 우리가 001번 ‘백색’ 페인트를 골랐다면 아마 우리 집 방문은 어딘가 모르게 차갑고, 스릴러에서 나오는 병원같은 느낌을 뿜어냈을 것이다. 쨍하고 쿨한 흰.색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따뜻한 집 분위기를 원했다. 우리가 원하는 심플하고 ‘하얀’ 문은 ‘백색’ 페인트 컬러가 아니다. 나는 이전의 뼈아픈 실수를 거울삼아 아이보리를 두 방울 정도 떨어뜨린 듯한 흰색으로 골랐다(약 003호 정도 되는 느낌이랄까?). 딱 맞는 페인트가 없어서 원하는 컬러를 별도로 조색까지 했다. 대충 타협해서 크림빛으로 잘못 골랐다가는 온통 집이 누리끼리해 보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인트칠은 시작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 어려운 그것, 바로 가구 배치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웬만한 센스의 소유자가 아닌 이상, 내가 고른 가구들이 잘 어울리는 조합인지는 상상만으로 판단하기 힘들다. 이것도 예쁘고, 저것도 예쁜 것 같은데 막상 함께 있으면 그림이 별로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의 언젠가는 ‘뭐 같은 컬러로 맞추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며, 이케아와 마켓비에서 그레이 톤의 가구를 한꺼번에 주문한 적이 있었다. 가구를 배치하고 나서야 ‘하늘 아래 같은 그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쿨 그레이와 웜 그레이는 물과 기름처럼 당최 어우러지지 않았다. 쳇, 쿨톤, 웜톤이 대체 뭐람?


 나는 실패 없는 신혼집 가구를 고르기 위해 인스타그램을 뒤졌다. SNS 속에는 뛰어난 센스를 가진 유저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센스의 소유자들이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마음에 드는 느낌의 이미지를 찾고, 그 가구들과 비슷한 걸 찾다 보니 문득 현타가 오는 거다. 우리 집은 저 인스타그래머들의 공간이 아니라 나와 H가 살 곳인데, 남의 취향을 따라 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따라가기에 내 센스는 영 뒤처지고, 집은 예쁘게 꾸미고 싶고…. 달콤한 이상과 쓰디쓴 현실이 뒤섞여 나는 며칠 밤 동안 사진만 뒤적거리다 잠들곤 했다.

나는 신혼집만큼은 대충 타협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느리지만 실패가 덜한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가구를 하나씩 순서대로 고르는 거다. 소파를 사고 나면 그에 어울리는 조명을 고르고, 또 소파와 조명에 어울릴 러그를 고르고. 그래서 집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들어오는 데는 무려 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반품도 종종 해야했다.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나와 H는 장기간에 걸쳐 집에 어울리는 것들을 정성 들여 골랐다. 그렇게 집을 완성하고나니, 우리 집의 모든 구석이 예뻐 보였다. 그 후로 우리집 보다 훨씬 예쁘고 멋있는 집을 수두룩하게 보았지만, 더 이상 그런 집들이 눈에 들어오거나 부럽지 않았다. 반려견에게 마음을 붙이고 나면, 걔가 믹스견이든 품종견이든 그런것 따윈 상관없듯이 집도 내겐 마찬가지였다. 집에 마음을 주고 나니 거실에 빛이 예쁘게 들어오는 시간을 발견하거나, 내가 열심히 고른 물건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집의 구석구석을 보는 게 행복했다. 그래서 바깥엔 잘 나가지도 않고 집에 크나큰 사랑을 쏟으며 마음껏 안을 누볐다.
 



 첫 신혼 집에서는 여섯 번의 계절을 보냈다.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떠나오던 날, 기분이 얼마나 서운하고 슬펐는지 모른다. 낯선 동네를 떠나 친구들이 많고 익숙한 동네로 다시 돌아가는 거라 마냥 즐겁고 신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기 싫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참 이상하다. 두 번째 집은 딱히 흠잡을 것 하나 없이 깔끔했고, 지하철역도 바로 앞에 위치한 신축 아파트였다. 친구들도 가까이 살고, 러닝하기도 좋고. 게다가 첫 번째 집에 비해 상가 단지도 잘 형성되어 있어서 모든 게 편안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 오래되고 많은 게 불편했던 첫번째 집에 더 애착이 갔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가 첫 번째 신혼집에 많은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오래된 신발장 문은 삐그덕 거렸으며, 욕조도 낡았지만 나는 우리 손으로 하나 하나를 고치고 꾸민 곳이니까. 
침실 한 편의 차콜 컬러 벽지, 식탁은 오래 머물고 싶어야 한다며 차가운 느낌을 주지 않는 소재로 고른 월넛 식탁, 천장에 선을 연장하여 설치한 식탁 등, 눈금 맞추느라 고생하며 붙였던
 주방의 타일 스티커, 하나하나 바꿔 달았던 무광 실버 컬러의 문고리…. 아직도 눈을 감으면 그 집의 풍경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암막 커튼을 젖히면 빛이 눈부시게 잘 들던 안방과, 반신욕을 하고 나와 따뜻한 차를 마셨던 거실이 눈에 선하다. 자고 일어나면 그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말이다. 


편의점을 가기 위해서는 단지를 벗어 걸어나가야 하고, 코감기 하나를 진료 받으려 해도 버스를 타고 나가야 병원에 갈 수 있었지만, 나무가 우거져 사계절이 아름다웠던 아파트 옆 숲길과 때론 오지랖 넓지만 친절하고 인간미 있는 경비 아저씨까지. 발을 딛고 사는 땅에도 이렇게 정이 들어버리다니. 아마 우리는 첫 신혼집을 오래도록 추억하며 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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