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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지 Jun 24. 2020

음식물 쓰레기, 누가 버릴래?

“쓰읍. 어디 기집애가 언성을 그리 높이노!”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가쓰나, 기집애, 어디 여자가.
 나의 어린 시절엔, 우리 부모님께 들어본 적도 없는 말들을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친구 아빠, 이모부, 심지어는 같은 여자인 옆집 아줌마도. 이런 말을 듣는 게 부당하다는 것을 누군가가 가르쳐주진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불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말을 하세요? 기집애가 왜요?”

당시 나는 작은 감정 하나까지 얼굴에 투명하게 드러나는 어린 나이였다. 이미 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대들었지만 그렇게라도 한 마디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어릴 때 겪은 경험은 생각보다 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뒤로 나는 남녀차별을 겪을 일이 딱히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차별을 당하진 않을까 싶어 본의 아니게 안테나를 곤두세우게 되었다.


그 안테나는 나의 결혼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신혼여행 직후 집안일을 리스트업 한 후, 어떻게 해야 5:5로 공평하게 나눌 수 있을지를 구상해보았다. 하지만 집안일이라 함은, 그 일의 속성에 따라 매일 자잘하게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있고, 하루 날을 잡고 많은 시간을 들여 해결해야 하는 것도 있으므로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 이를 반반으로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의도치 않게 합이 맞아 집안일이 잘 나누어지는 분야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빨래를 색깔과 소재별로 나누어 세탁하고 탈탈 털어 너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꼈고, H는 빨래를 개는 걸 선호했다. 나는 요리보단 설거지하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고, H는 치우는 것보다 요리하는 게 훨씬 재밌다고 했다. 그땐 꼭 우리가 운명의 짝을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쩜 이렇게 잘 맞을 수가!

하지만 이런 경우는 수많은 요소 중 일부에 불과했다. 사람이 어쩜 그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어떨 땐 하루에 다섯 번을 다투기도 했다. H는 내게 종종 ‘왜 그렇게 5:5를 주장하냐고, 칼로 자르듯 모든 걸 반반으로 하면 우리가 진짜 행복할 것 같냐’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H가 집안일의 책임을 5로 맡기 싫어서 저렇게 말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도 잠깐 했다.


그런데 머지않아 평소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의 집안일 중엔 역할을 제대로 분담하지 않은 일도 더러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그때그때 번갈아 가면서 했다. 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먹고 난 과자 봉지만 휴지통에 잘 넣어도 만사형통이었지만, 이제는 음식물 쓰레기를 차곡차곡 모아 아파트 1층에 있는 음식물 수거통에 붓는 것까지가 우리의 몫이 되었다.

신혼 생활을 시작했던 겨울부터, 늦은 봄이 될 때까지만 해도 이 일이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여름이 되고 날씨가 더워지자 내게 이 일은 너무나 고역이었다. 숨을 꾹 참고 수거통을 열어도 악취 분자들이 코 깊숙이 들어올 때, 뚜껑을 열었는데 음식물이 끝까지 차있어 수거통 4개를 다 열어야 할 때, 반대로 수거통이 너무 안 채워져 있어 음식물이 낙하하며 액체들이 튈 때. 그럴 때면 나는 패닉 상태에 빠져 수거통 앞에서 ‘으!!!’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런 패닉이 두세 번 반복되자, 음식물을 버려야 하는 때가 되면 나는 그 일을 미루기 시작했다. 지금은 내가 해야 될 차례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자, H가 낌새를 알아챘다. 매번 5:5! 를 슬로건처럼 외치던 내가 슬쩍 일을 미루자, H는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느 날 내게 음식물을 비우고 와달라고 말했다. 두려움이 엄습한 나는 쉽사리 엄두가 나지 않아 볼멘소리를 했다.

“나 이거 가을에 하면 안 돼?”
 “왜? 반반 하자며.”
 “하…. 진짜 못하겠어.”

“그럼 여름엔 누가 해? 나는 하고 싶겠어?”

H가 맞는 말을 했다. 할 말이 없었다. 5:5를 주장한 사람도, 지금 잘못하고 있는 사람도 바로 나니까. 울상을 짓고 있으니, H는 이성적이고 건조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도 소용없어’라는 뜻이다.

괜히 서러워진 나는(물론 잘한 건 없지만) 이 상황을 피하고 싶어서 안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H가 나를 달래주러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잠시 품어보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온 집안에 정적이 흐른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렇다. 우리는 폭염이 절정이던 한여름에 싸웠고, 선풍기와 에어컨은 모두 거실에 있는데 나는 안방으로 들어와 버린 것이었다. 아마 H는 지금쯤 시원한 바람을 쐬며 유유히 휴대폰을 보고 있을 것이다. 반면, 문이 굳게 닫힌 안방은 점점 한증막이 된다. 하지만 H가 나를 달래주러 안방으로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걸치고 있던 가디건 하나도 벗을 수 없다. 휙 들어가던 모습 그대로 누워있어야 한다(안 그러면 왠지 모양 빠지는 것 같다).

한증막이 된 안방에 한참을 누워 있으니 망할 놈의 5:5가 다 무슨 소용인지. 서러운 감정은 싹 사라지고, 얼른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온통 머릿속에 가득 찬다. 어떻게 해야 모양 안 빠지게 안방에서 나갈 수 있을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안방 문을 열고 나가 H에게 이렇게 말했다.

“H, 음식물 쓰레기는 앞으로 네가 버려줄 수 있어?”

“……?”

“그 대신, 화장실 청소를 내가 할게. 변기도 다 닦고, 하수구도 내가 치울 거야.”

H가 피식 웃는다.

“음식물 비우는 게 그렇게 힘들어? 화장실 청소를 다 한다고 할 만큼?”

“엉….”

또 그 고역이 다시 떠올라 눈두덩이가 뜨거워진다. H가 두 팔을 내민다.

“이리 와아.”

그렇게 한여름의 음식물 쓰레기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그날부터 나는 화장실 담당, H는 음식물 담당이 되었다)


결혼 후 2년 반의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를 다시 돌아본다. 그동안 H는 약속시간에 늦어 허둥지둥 대는 나를 대신해 설거지를 해주기도 하고, 빨래가 많은 날이면 함께 널어주기도 했다. 내가 입버릇처럼 외쳤던 5:5는 H의 유연함으로 조금씩 깨어져가는 중이다. 어쩌면 평등의 답이 정확한 반반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삐그덕 거리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하나씩 맞춰가면서, 비로소 우리는 가족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 나도 내일은 H와 같이 빨래를 개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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