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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이먼 Dec 28. 2020

가진 게 몸뚱이와 시간뿐이라

맨땅에 헤딩하며 성장하는 짜릿함

그냥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거란 말이죠.
그게 내가 찾은 방법이에요.
- 드라마 <미생> 중에서


아, 나 가진 게 진짜 별로 없구나


첫 회사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신입 사원의 패기였을까? 아니, 경쟁을 뚫고 선발된 자의 오만이었다. 웹 서비스 운영팀에 배치된 이후 몇 달 간은 대혼란의 연속이었다. 지도 없이 아마존 밀림 한복판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신입 사원을 위한 매뉴얼이나 가이드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회사라는 사회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인턴이라는 예방접종을 맞은 동기들은 한결 편해 보였다. 직장 상사들은 하나같이 어려웠고 클라이언트는 물론 더 어려웠다. 협력업체 개발자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난해한 프로그래밍 용어들 속에서 금방 길을 잃었다. 해야 할 일은 무엇이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허둥대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나가버렸다.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스스로 살아남으려면 무기를 갖춰야겠다 생각했다.


뭐라도 배워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부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선택한 과목은 프로그래밍이었다. 백엔드 언어인 루비 레일즈를 배우는 수업이었다. 그때 배운 백엔드 개발에 대한 기본 개념이 지금 일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긴 하지만 퍼블리셔들과 일하던 당시의 나에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강좌였다. 중요도로 따지면 AE에게 프로그래밍은 선택교양 수업이었다. 전공필수는 에이전시 업계의 일하는 방식과 회사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해였다.


그야말로 뭘 모르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역으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배움에 대한 절박함이 샘솟았다. 대학 시절처럼 누군가 중요한 과목부터 커리큘럼을 짜준다면 보다 체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겠지만 회사에서 그런 기대는 사치다. 가리지 않고 배워 놓으니 다 쓸 데가 있다. 1~2년 차에 배운 데이터 분석 툴이나 프로그래밍 기본 지식들이 지금 IT 기획자로 일하는 데 큰 양분이 되고 있다.


멋모르고 덤빌 때가 좋은 거야


사람이란 동물은 참 약아빠졌다. 거친 환경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업무가 손에 익자 배움에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모든 업무를 적당히 쳐내고 있지만 무엇 하나 탁월하게 하는 게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여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사이트의 노다지, 현장 속으로


O2O 서비스 회사에 B2B 서비스 기획자로 지원했다. 요식업계 사장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일이라고 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학교에서 4년 간 인류학을 공부하며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다. 막힐 땐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직접 관찰해야만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있다. 장사를 직접 해본 적이 없다면 뉴스 기사나 인터넷 검색만으로 식당 운영의 어려움을 발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고객인 사장님을 이해하려면 사장님을 만나야 한다. 인사이트는 늘 현장에 널려 있다.


면접을 앞두고 동네 단골 설렁탕 가게에 찾아갔다. 밤늦은 시간이라 매장 안이 한산했지만 사장님은 정산 업무로 바빠 보였다. 설렁탕 한 그릇을 주문하고 한참 눈치를 보았다. 혹 실례가 되지 않을까, 고민도 됐지만 절박함이 민망함을 앞섰다. 카운터에서 사장님께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나 : 안녕하세요, 제가 다음 주에 면접을 보거든요. 그래서 몇 가지 사장님께 여쭤보고 싶은데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사장님 : (당황해하며) 네? 무슨 면접을 보길래 그러세요? 뭐가 궁금하세요?

나 : 아, OOO 서비스 회사예요.

사장님 : (재밌다는 듯이) 잠깐이면 시간 괜찮을 거 같아요.


용기를 낸 보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주신 사장님께 참 감사하다. 그런데 그 귀중한 시간에!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가장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서비스 이용하면서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묻고 나서 아차 싶었다. 보통의 사용자는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불편한 점을 의식적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따라서 심층 인터뷰를 할 때는 다양한 질문을 통해 사용자가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서비스의 문제점을 캐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사장님은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버린 셈이다. 무슨 질문을 더 해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사장님께 주문 접수 프로그램과 매출 정산 프로그램 화면을 볼 수 있냐고 여쭤보았다. 이는 인류학자들이 인터뷰를 시작 전에 사전 지식을 얻기 위해 많이 활용하는 방법이다. 현장을 면밀히 관찰하며 기본적인 정보를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인터뷰 질문을 작성한다. 처음 보는 종류의 프로그램 UI들이었고 궁금한 것들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음번에 찾아갔을 땐 좋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었고 이는 이직 면접뿐만 아니라 입사 후 업무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해당 업계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있었다면 구태여 현장을 방문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무지에 대한 위기의식이 배움에 대한 절박함이 되었다. 주니어 기획자들은 아직 모르는 게 많다. 잘 모를 때 오히려 무모하게 직접 부딪쳐 보면서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리 빨리 이 새벽을 맞아도 어김없이 길에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들이 아직 꿈속을 헤맬 거라 생각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세상은 나보다 빠르다.
- 드라마 <미생> 중에서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배움에는 끝이 없다. 맨땅에 헤딩하는 건 아프지만 종종 짜릿하다.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간절함을 계속 느끼고 싶다. 그 단골 설렁탕 가게에서 저녁을 먹을 때마다 늘 다짐한다. 가진 게 몸뚱이와 시간뿐이던 그 시절 마음을 잃지 말자. 초심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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