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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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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쑤 Jun 16. 2016

구문초: 뻑적한 엄마 생각

예전에 함께 살던 개와 집 근처 우면산 산책을 갔을 때의 일이다. 목줄을 걸고 산책을 하다가 우면산 중턱을 조금 못 간 지점에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너른 바위 언덕같은 공간이 있어서 목줄을 풀어주고 잠시 자유를 주었다. 항상 사람들로 북적이는 우면산에 이런 망중한 같은 바위언덕이 있다니, 웬지 나만의 비밀장소를 찾은 것 같아서 나도 바위에 주저 앉아 쉬었다.


그런데 내 시선에 스르르 개가 한 마리 나타났다. 들개라 하든 산개라 하든 아무튼 사람과 친숙한 기운보다는 야생의 늑대 기운이 확 느껴지는 개였다. 덩치도 컸다. 복실이 (개 이름)는 체중이 2킬로그램이 될까말까하던 작은 5살짜리 마르티스 종이었는데, 복실이 열배는 될 것 같은 개였다. 나는 개를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그 순간에는 공포감을 느꼈다. 그 개의 기운과 표정이 그랬다. 나는 주저앉은 자세로 얼어붙은 채로 삼사초 정도 있었는데 이러고 있다가는 복실이든 나든 저 개한테 물어뜯길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최대한 비공격적인 동작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그런데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으려니 복실이가 나와 늑대개 사이에 버티고 서는 것이었다. 태양과 지구 사이에 달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서 개기일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늑대개와 나 사이에 복실이가 버티고 섬으로써 내 머릿속이 순간 새까매졌다. 너른 바위 언덕에 그렇게 일직선상에 서 있는 나와 늑대개 사이는 1.5미터쯤 되었을까. 그리고 그 사이에 복실이가 있었다. 늑대개랑 한판 붙기라도 하려는 듯 잔뜩 몸을 낮추고 그르렁되는 복실이를 보고 있으려니, 저 쪼그만 게 미쳤나 싶으면서도 저게 나를 지켜주려고 그러는 건가 싶어 찡해지면서 어서 정신차리고 여기서 피해야겠다 싶었다. 가시지 않는 두려움에 심장이 쿵쾅거리다 못해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정도였지만, 나는 복실이를 덥석 들어안고는 뒷걸음질을 한발짝했다가, 야생동물에게 등을 보이면 안 된다는 말이 순간적으로 떠올라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게걸음질을 해서 바위언덕에서 도망쳤다. 똥줄 탄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낀 때였다.


늑대개가 시야에서 벗어나고 우리를 쫓아오지도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정말 냅다 달렸고 우면산 초입의 주택가까지 와서야 나도 멈추어 숨을 털어놨는데, 복실이가 그제서야 낑낑대면서 내 얼굴이며 손이며 할 것 없이 엄청 핥아대는 것이었다. 늑대개의 코 앞에서 그렇게 버티고 섰었을지언정 저도 무섭기는 무서웠었나보다. 복실이를 한참을 얼러주고 안아주고 부벼주고 하는데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려서 우리집은 무서울 때가 많은 집이었다. 가정에서 가족들 간에 일어나는 폭력을 동반한 전쟁이 얼마나 몸쓸 일인지는 겪어본 사람은 치를 떨면서 기억할 것이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떨쳐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새겨짐을 알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엄마라는 존재들은 그런 전쟁을 치러내면서 몸이든 마음이든 많이 다치는데, 또 많은 경우 엄마라는 존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치않은 심신으로 자식을 살핀다. 나의 엄마도 그랬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에 지금 생각해보면 별 도움 안되는 행동들을 많이 했다. 마치 복실이가 늑대개와 나 사이에 버티고 서서 그르렁거렸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지켜주지 못한다고 해도 그냥 엄마 혼자 두고 엄마 혼자 전쟁을 치르게 하는 것 자체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래도 엄마는 항상 용수철처럼 기운을 차렸고 생활력이 강했고 나쁜 일을 기억하는 뇌의 부위에 고장이 난 것처럼 금새 웃었고 내게 힘을 주었다.


그런가하면, 대체로 험난한 가정의 상황이 그렇듯 우리집은 경제적으로도 많이 부족했다.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외삼촌 집에 갈 때면 엄마는 욕실로 데려가서 내 머리를 감겼다. 당시 외삼촌 집은 반듯하고 쾌적한 아파트였다. 엄마는 나 뿐 아니라 오빠도 머리를 감겼다. 세숫대야를 향해 머리를 거의 처박듯이 하고 그에 따라 엉덩이는 엉거주춤 위로 향한 채로 엄마가 감겨주는 대로 있을 때, 외삼촌이 마땅찮은 표정과 말투로, 누나는 왜 여기서 애들 머리를 감겨, 라고 물었었다. 그리고 엄마는, 그럼 어디서 감겨, 하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대답했다. 외삼촌의 말이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우회적인 힐난의 표시라는 것은 엄마도 알고 외삼촌도 알고, 어린 나도 알았다. 아마 외삼촌은 안방 어딘가에서 외숙모의 바가지와 다짐을 받고 나와서 그 말을 던졌을 것이다. 내가 외숙모였더라도 그랬을 것이고, 우리 엄마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그 눈치를 받으면서도 자식 새끼들 머리를 뜨거운 물에 감겨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나보다. 그 때 일이 지금도 생각나는 것을 보면, 내 스스로도 민망했고, 어린 마음에 그런 엄마가 싫으면서도 화가 날 정도로 애처로웠나보다.


예전에 읽은 어느 책 (제목이 기억 나질 않는다)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아이를 낳아 키우는 아이 엄마를 묘사한 대목이 있었는데, 아이 엄마의 행색은 초라하고 얼굴에 혈색도 돌지 않고 삶의 피로가 여실히 드러났으되 “등에 업혀 잠든 아이가 자신의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나의 엄마에게도 내가 심장 같은 존재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엄마가 내게 있어 심장이 온 몸에 피를 뿜어 보내듯이 나의 인생에 동력을 부여한 존재였다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별 탈 없이 살고 있는 것이 모두 엄마의 덕분이라고 확신한다.


그러한 나의 엄마가 준 것이다, 우리집 구문초는.


지금 사는 아파트에 이사들어올 때 엄마가 엄마집에서 키우던 걸 내게 준 것이다. 내가 여름이면 모기때문에 고생하니 별로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모기 쫓는 구문초를 준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들이마시는 공기의 소중함을, 미세먼지가 캐캐하게 깔려 봐야 알게 되고 극단적으로는 비닐봉지를 뒤집어써봐야 아는 것처럼, 구문초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항상 잘 자라서 소중함을 잘 모르게 되는 것 같다. 그만큼 참 잘 산다.


아파트의 베란다라는 것이 크기나 폭이 참 뻔하고, 그 한정된 공간 내에서도 볕과 바람이 제대로 드는 명당 자리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각지대가 있게 마련인데, 햇빛 타령 바람 타령하는 율마나 허브들에게 그런 명당자리를 내어주느라고 구문초는 대체로 외진 자리로 옮겨진다.<어머님의 은혜>라는 노래 가사에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라는 구절이 있는데, 구문초는 대체로 마른 자리를 양보하고 진 자리 로 물러나서도 군말 않고 억척스레 살아가는 식물이라고 할 수 있다. 햇빛이 조금 부족해도, 바람이 조금 덜 들어도, 간혹 물 주는 것을 깜빡해서 흙이 먼지 날리도록 말라도 잘 살고 금새 생기를 찾는다. 그리고 그러다가도 한번씩 쓰다듬어주고 말도 걸어주고 비료라도 한 번 주면 엄청 신이 나는지 금새 폭풍성장한다. 가지를 잘라서 흙에다 그냥 푹 꽂아놔도, 어느날 죽었나 싶어서 보면 싹이 움트고 있다.


누군가가 말하길 가드닝 고수들은 장미에 환장한다길래 왜냐고 물었더니, 장미 키우는 게 엄청 까다로워서 그렇다고 한다. 또 장미는 비싸다. 내가 이따금씩 가는 화원에서는 사람 이름을 띤 장미 (유럽의 한 나라에서 건너온 유명한 종자라고 한다)를 팔곤 하는데, 가격을 물어봤다가 깜짝 놀랐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구문초는 장미와는 극단의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구문초는 애지중지 보살펴주지 않아도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서 풍성하고 향기롭고 초록초록하게 팔벌리고 있는데, 장미는 자꾸 꼬여드는 벌레들 단속도 해야하고 시시때때로 이런저런 적절한 조치들을 취해줘야 한다. 장미가 백화점에서 파는 명품 가방이라면 구문초는 마트에서 나눠 주는 천 가방 같다고 할까.


난데없이 가위손 충동이 이는 날이 이따금씩 있는데, 그럴 때 애꿎은 구문초를 붙잡고 이발을 해댄다. 명동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잎파리 한 두 개 뜯어낸다고 해서야 이발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다른 식물들이라면 그런 대대적인 이발을 겪고 나서 다시금 수북하게 자라나려면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할 것이지만, 구문초라면 두어달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구문초는 가끔씩 볼품없는 막대기구문초가 되기도 한다. 그래도 구문초는 또다시 잘 자라나서 헤죽헤죽 웃으며 내게 더더욱 풍성해진 수풀을 보여주려고 한다.


8년전쯤인가, 점심을 먹고 나서 회사 동료와 회사 휴게실에 차를 한 잔 하러 들어갔을 때 휴게실 내에 있던 텔레비젼에서 엄마를 봤던 적이 있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미처 화면을 보지 못했었는데, 회사 동료가 화면을 보면서 “야, 남현동 김영희랜다, 너랑 똑같네”하길래 그제서야 화면을 봤더니, 엄마다. 나의 엄마가 맨 얼굴에 부스스한 브로컬리파마 머리 그대로 우리집 거실 바닥에 앉아서 뭔가를 계속 얘기하고 있었고 화면 가득한 엄마 얼굴 아래에는 “김영희, 남현동, 주부”라는 자막이 떠 있었다. 사연인즉슨, 당시 우리는 봉천동에서 남현동으로 이사를 하면서 기존에 쓰던 통신사 A의 인터넷 회선을 옮겨와야 했는데, 남현동 집에는 해당 통신사의 회선을 사용할 수 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해지를 해야했다. 그런데 통신사 측에서 2년 약정을 채우지 못하고 해지하는 것이니 20만원의 위약금을 내라고 했던 것이다. 20만원이라는 소리에 “호랭이가 물어갈 놈들” 하면서 미치고 팔짝 뛰었을 엄마는 방송통신위원회 민원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소비자보호원에 전화를 넣고 하였고, 당시 우리와 비슷한 위약금 분쟁사례가 많았던지 소비자보호원에서 엄마에게 인터뷰제안을 했으며, 엄마는 20만원을 내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소비자보호원 담당자의 말 한마디에 이런 용감한 인터뷰를 한 것이다. 화장이라도 좀 하고 옷도 좀 좋은 걸로 입고 소파에라도 좀 앉을 것이지.. 어쨌든 당시 인터넷회선의 명의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었으므로 이 모든 일련의 행동들은 모두 내 이름으로 이루어졌었고, 그리하여 남현동의 김영희인 나는 텔레비젼에 또다른 남현동의 김영희를 보게 된 것이다. 그 즉시로 엄마는 나의 항의성 외침과 면박에 가까운 투정을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엄마는 인터뷰 덕분에 20만원의 위약금을 안 내게 됐을 뿐 아니라 10만원 상당의 상품권도 받았으니 얼마나 잘된 일이냐며 싱글벙글이었다.


나의 엄마는 그런 사람이다.


오늘 이상하게 구문초가 엄마같아서 기분이 이상하다. 쨘하고 미안하다가도 속상하고 답답하다. 왜 이렇게 미련하고 억척스럽게 잡초마냥 사냐고 막 따지고 싶다. 정말 모기를 쫓는지는 잘 모르겠고, 엄마라는 뻑쩍하고 뭉근한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다 큰 어른, 아니 이제 크는 단계가 아니라 늙어가는 단계에 진입한 머리 희끗한 어른에게 엄마란 존재는 참... 코메디 보다가 흘리는 눈물 같다.


최근에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에 대한 책이 종종 눈에 띄는데, 무슨 내용일지 대강 느낌은 든다. 엄마와 딸이라면 누구나 겪어봄직한 그러나 말로는 참 설명하기 복잡미묘하고 희한하기까지 한 관계이자 감정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는데, 참 재미있게 읽었다라거나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거나 하는 말로 소감을 뱉어버리기에는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비록 표절 시비로 얼룩이 생기긴 했지만,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켰으리라고 생각된다. <엄마를 부탁해>에서 딸이 엄마에게 언젠가부터 손님이 되었다고 말한 부분이 있었는데, 좋게 말해서 많이 공감을 했고 솔직히 말해서는 많이 찔린 부분이었다. 아래에 인용한다.


엄마에게 너란 존재가 딸이 아니라 손님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은 엄마가 네 앞에서 집을 치울 때였다. 어느날부턴가 엄마는 방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걸었고, 식탁에 음식이 떨어지면 얼른 집어냈다. 예고 없이 엄마 집에 갈 때 엄마는 너저분한 마당을, 깨끗하지 못한 이불을 연방 미안해했다. 냉장고를 살피다가 네가 말려도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엘 나갔다. 가족이란 밥을 다 먹은 밥상을 치우지 않고 앞에 둔 채로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관계다. 어질러진 일상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엄마 앞에서 네가 엄마에게 손님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26쪽


엄마와 나 사이에 아직도 새끼줄로 꼬아놓은 것 같은 탯줄이 존재하긴 하는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엄마가 내 눈치를 조금씩 본다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엄마 스스로의 변화가 아니라 나로 인한 변화일 것이다. 내가 마치 대접받아 마땅한 손님인양 행동하고, 엄마보다 많이 배우고 많이 번답시고 가르치고 바로잡으려 들고 조금 마음에 안 들라치면 짜증을 내고 하다보니 엄마가 그렇게 된 것이다.


소설가 고 박완서씨가, 증손자 볼 나이임에도 난 아직도 엄마가 필요해,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백번 동감한다.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구문초

학명: Pelargonium graveolens (Pelargonium rosium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많으니 참고하시길)

영명: Rose Geranium

생물학적 분류 (문/강/목/과): 속씨식물문 쌍떡잎식물강 쥐손이풀목 쥐손이풀과

원산지: 이집트 등 남부아프리카가 원산지라고 한다


햇빛:

베란다 어디에서든 키우기 좋지만, 좁은 베란다에서도 볕이 잘 드는 명당 자리는 햇빛타령이 심한 율마에게 내어주고, 구문초는 명당 아닌 자리에 놔둬도 튼실하게 잘 산다. 밝다 싶은 곳에 놔두면 그걸로 오케이인 것 같다. 오히려 직광은 좋지 않다고 한다.


바람:

구문초는 이래저래 까다롭지 않은 생명력 강한 아이지만, 그래도 제라늄 품종인지라 환기와 통풍은 중요한 것 같다. 방안에서는 아무래도 바람 요건을 맞추기가 쉽지 않고, 역시 베란다에서 혹은 베란다에 면한 거실에서 키우는 것이 제일 낫다.


물주기:

나는, 어라, 물을 언제 줬더라, 싶은 간격으로 물을 주는 것 같다. 물론, 겉흙 색깔도 보고, 손가락도 쑤셔보고 하며 흙의 수분기를 판단하지만, 대체로 흙이 좀 마른다 싶을 때에야 물을 흠뻑 준다.


내한성/월동:

이집트가 원산지,라는 것을 보면 내한성은 꽝일 것 같고, 영하에서 잘 못견딘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집 구문초는 베란다에서 한겨울을 거뜬히 보냈다. 나는 통풍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베란다 창문을 아주 조금은 열어놓는다. 그래도 구문초는 말짱하게 탈없이 월동했다.


성장:

키를 재지 않아서 몇 센티가 자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쑥쑥 잘 자란다. 3월인가에 봄맞이 가지치기를 한답시고 거의 삭발을 해줬는데, 5월에 이르니 파마머리가 되었다.


번식:

구문초의 생명력과 번식력은 정말 인정해야 한다. 삽목이든 물꽂이든 잘 되지만, 둘 중에는 삽목이 더 나은 것 같다. 가지를 흙에 꽂으면 휘지 않고 그대로 자라지만, 물꽂이를 하면 등이 굽은 듯 가지가 조금 말린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든, 구문초는 쨘할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나의 남편이 과감한 전정을 하면서 항상 하는 말은, 구문초는 그래도 안 죽어, 이다.



매력 포인트:

구문초는 말 그대로 모기를 쫓는 풀이다. 로즈제라늄이 구문초라고 불리우는 이유는 그 특유의 향 때문이다. 구문초의 잎에서는 짙은 향이 나는데, 베란다에 바람이 불 때 향이 딸려오기도 하고, 베란다에 빨래 너느라 왔다갔다 할 때 엉덩이로 다리로 구문초를 살짝살짝 스쳐도 향이 다가온다. 손으로 만지작거리면 손에 향이 남는다. 사람에겐 기분 좋은 향이 모기한테는 다가가기 힘든 냄새라니, 자연의 섭리는 참 오묘하다.


유의사항:

기본적인 사항, 가령 과습주의, 통풍시켜주기 등을 제외하면 별로 없는 것 같다.


보너스:

구문초는 그냥 놔두면, 미친x 머리 모냥 산발하기 쉽다. 쑥쑥 자라나는 목대를 잘라주면 목대가 굵어지니, 굵직한 외목대를 가진 토피어리형의 구문초를 시도해봐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산발하도록 놔둔 다음 아랫동네 잎을 다 따고 윗동네만 남겨서 여러 목대를 가진 숲처럼 만들어도 좋다. 나도 삽목한 구문초로 토피어리형을 시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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