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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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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쑤 Jun 24. 2016

헬리오트로프: 삶이라는 짐마차

나는 나이 먹는 게 좋은데, 라던가, 나는 마흔이 되니까 좋아, 라던가 하는 말을 나는 종종 한다. 그런데 정말로는 나는 아직 나이듦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식물을 많이 들였지만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식물들이 거의 대부분이고 꽃을 피우는 식물은 거의 들이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지금 우리집 베란다에 있는 꽃은 딱 하나 헬리오트로프인데, 이 꽃을 들인 것도 온도만 맞으면 일년내내 피고지고 피고지고 한다던 화원주인의 말 때문이었으니, 나는 꽃에 대하여 아직 꼼수를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20대는 꽃봉오리의 시기, 갈망과 가능성의 시기였다. 신나게 경험하고 기대에 차서 두드려보고 작은 결과에도 큰 가능성을 기대하고 입술에 힘을 주며 애를 쓰고 폭풍처럼 화를 냈다. 돈과 명성에 좀 더 가까워 보이는 말들에 팔랑귀가 되어 맥락없이 기웃거리다가 결국에 손에 쥔 것은 별로 없음을 깨달아도 아직은 남아 있는 가능성에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들어선 30대에는, 역시 별로 거창하게 이루어놓은 게 없을지언정, 그래도 좀 더 내공이 들어찬 느낌에 만족도 하고 조금 더 커진 생활의 단물을 즐겼고 질주하던 인생이 조금 잦아들고 있는 느낌이 주는 안정감도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 삶의 정체가 얼추 드러난 느낌이 든다. 이제 만개할 꽃의 모습이 대강 보인다. 그런데 씁쓸하게도, 삶의 안정된 정착이란 것은 뒤집어보면 사라진 가능성들에 대한 체념 내지는 타협일 것이다. 정착의 한편으로는 남의 떡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내 친구 하나의 말, 이 지점에서 삐끗하면 원인이 불분명한 중년의 홧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방팔방 모든 일이 경쟁으로 가득 차서 이겨야만 하고 남보다 나아야만 하고 나이 들기 무섭게 뒤처지고 내몰리는 일들이 허다한 우리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설상가상, 이제는 놀라울 것도 없는 흰머리를 보면서 곧 다가올 쇠락을 땡겨서 걱정하고 있다. 백세인생이나 인생2막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내게는 더 많은 날이 남았을텐데 나는 어찌 살꼬, 싶다. 달마다 달콤한 월급을 주는 회사는 언제까지 다닐 수 있을란가, 하는 마음과 같이, 만개한 꽃을 꺾어 물병에 꽂아 놓은 다음 하루라도 더 생생하게 머물기를 아슬하게 바란다. 점차로 시간이란 것이 너무 빠르고 야속하게 느껴진다.


지난 3월 양재시장에서 데려온 헬리오트로프는 4월 즈음에 함빡 꽃이 피었다 지고는 아직 다시 피지 않았다. 요즈음의 날씨라면 화원주인의 말대로 온도가 맞으니 다시 피어야 하는데 아직이다. 목대만 남기고 줄기를 바짝 다 잘라내서 사슴뿔 미니어쳐처럼 되었었는데 그 후 보름도 안되어 잎과 줄기가 수북하게 자라날 정도로 왕성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꽃은 다시 피지 않는다. 내년 4월이면 다시 피겠지만 나는 조급하다.


그래도 역시 꽃은 꽃. 지지고 볶는 너의 마음은 나는 모른다, 하며, 지름 1센티도 안되는 보라색 꽃잎들이 한데 모여 꽃볼을 이루며 아름답게 피어난다. 헬리오트로프는 색깔명으로도 채택되었다고 하는데 자주색과 보라색과 남색과 흰색이 배합된 후 살짝 무채색으로 톤을 조절한 듯한 오묘한 색을 띤다.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펼쳐진 짙은 녹색의 잎과 참 잘 어울리는 색이다. 향도 그에 못지 않게 고혹적이서, 헬리오트로프는 향수 원료로도 쓰여 향수목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헬리오트로프의 향을 사람들이 주로 초코바닐라 향이라고 표현하는데 달달하니 적당한 표현인 것 같다.

헬리오트로프를 보며 꽃에 대해 담담해지자고 생각한다. 철 따라 피었다가 지는 것이 순리이니, 내 화분에서 열심히 꽃을 피운 식물에 불만을 갖지도, 불안해하지도 말자고 생각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내 꽃이 제대로 만개할 수 있도록, 벌레에 시달리지 않고, 햇빛에 타지도 말고, 목말라 시들지도 말도록 소중하게 두고 보다가, 꽃대를 꺾어 화병에 꽂아 그 꽃의 마지막 아름다움을 누리면서 또 다음 해를 기약하며 도닥거려 주는 것이라고.


담담해지는 것에서 더 나아가, 다음해의 꽃을 기약하듯이 내 남은 인생을 새로운 기대로 준비하자고 생각한다. 어느 화원주인의 말에 따르면 꽃이 피는 식물은 5월말에서 6월초에 꽃대를 잘라줘야 다음해 꽃이 잘 자란다고 한다. 꽃대를 자르는 시기를 놓쳐서 다음해의 꽃마저 비실하게 하지는 말아야 겠다.


이외수는 <하악하악>에서, 욕망은 그대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소망은 그대 발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법, 이라고 했다. 이러한 생각들이 차오르며 나이가 드는 모양이다.   




삶이라는 짐마차 -알렉산드르 푸슈킨


어쩌다 무거운 짐이 실려도/ 달리는 마차는 가볍다/ 기세 좋은 마부, 백발의 시간은/ 고삐를 잡고 놓치는 법이 없다


아침부터 우리는 마차에 올라/ 목이 부러져도 좋아라/ 게으름과 편안함을 경멸하며/ 외친다, 달려라!


하나 한낮이 되면 이미 기세가 꺾여/ 피곤에 지쳐 비탈길도 골짜기도/ 점점 더 겁이 나/ 외친다, 좀 천천히, 바보야!


여전히 마차는 달리고/ 저녁이 되면 우리는 마차에 익숙해져/ 졸면서 잠잘 곳을 찾아가는데/ 시간은 바짝 말을 몰아댄다


“청년 시절에는 인생이라는 짐의 정체를 모르고 실린 대로 무거운지 아닌지 가늠하지도 못하고 마구 앞으로 달리느라 정신이 없다. 중장년이 되면 세파에 이리저리 부딪히고 지치고, 인생 굴곡의 정체를 점점 더 확실히 알게 되면서 그 무거운 짐이 무서워지고, 세상에 행복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어느새 노년이 되어 인생이라는 짐에 익숙해진 채 여생을 정리하며 삶과 죽음을 완성해 갈 때에는 시간이 무척 소중해지는 법이리라.”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러시아 명시 100선, 최선 편역, 북오션, 2013, 24-25쪽.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헬리오트로프      

학명: Heliotropium arborescens               

영명: Garden heliotrope, Cherry pie              

생물학적 분류: 속씨식물문 쌍떡잎식물강 통화식물목 지치과 헬리오트로프속         

원산지: 페루, 에콰도르에 250여종이 있다고 한다.


햇빛:

태양 (helios)을 향해(trepein) 꽃이 핀다하여 헬리오트로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것처럼, 햇빛을 좋아한다. 정말로 햇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목을 기울이므로 눈에 띌 때마다 화분을 돌려주기도 한다. 밝은 곳에 놔둬도 된다고 하지만, 역시 꽃이 피는 식물은 햇빛을 많이 보아야 꽃색이 제 빛으로 충분히 우러난다.


바람:

바람이 드나드는 베란다 창가에 두었다. 햇빛과 물을 좋아하니 바람도 당연한 셋트처럼 따라와야 하는 요소일 것이다. 실내에서 키우는 것은 햇빛보다는 바람의 요인 때문에 힘들 것이다.

              

물주기:

흙에 수분기가 축축하니 (척척한 것은 말고) 유지되는 것이 좋은 식물인 것 같다. 손가락을 쑤셔봤을 때 흙이 말랐구나 하는 때에 물을 줬더니, 줄기들이 풀썩풀썩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도 물을 주면 다시 명랑하게 고개를 들어올리니 건조함에 아주 약한 것 같지는 않다.

          

내한성/월동:

내한성이 거의 제로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차차 적응시켜서 베란다에서 겨울을 나게 해볼 생각이다.

         

성장:

꽃대를 바짝 잘라도 잎들이 쑥쑥 올라온다. 4월말엔가 목대만 남기고 꽃대를 다 잘라냈는데 5월말이 되니 수북하게 잎이 자라났다. 키는 50센티정도까지 자란다고 하는데, 나는 키는 너무 키우고 싶지 않고 목대 굵은 나무처럼 키우고 싶어서 생장점을 잘라줬다.기온만 20도 전후에서 유지되면, 사계절 내내 꽃이 피고지고 한다는데, 4월에 꽃대를 잘라난 이후 꽃은 아직 다시 못 보았다. 화원주인의 말로는, 가을까지도 꽃이 피고 지고 한다고 했는데 내 꽃은 아직이다.


번식:

햇빛 타령 바람 타령 하는 것을 보면 유약할 것 같은데 생명력과 번식력은 강하다.  삽목도 잘 된다고 하는데, 나는 삽목은 해보지 않았지만, 양재시장에서 포트 하나에 2500원 하는 것을 보면 삽목이 잘 되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매력 포인트:

헬리오트로프의 꽃은 향이 짙고 고혹적이어서 향유로도 만들어질 뿐 아니라, 그 색도 딱 제 향기에 어울리는 색이다. 흔히들 바닐라 초콜릿 향이라고 하는 것 같다. 향과 색이 한 맥락이 되어 향료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향기가 좋은 꽃색이나 엷은 청자색(靑紫色)을 뜻하는 색깔이름으로도 쓰인다고 한다.    


유의사항:

꽃과 줄기, 뿌리에 약하긴 하지만 독이 있다고 하니 먹지 말 것.    

       

보너스:

자글자글하니 미니 나팔꽃들이 모여 피는 남보라색 꽃들이 그 자체로 꽃다발 같다.  작은 꽃들이 모여 꽃볼처럼 둥글해졌을 때 꽃대를 잘라 물에 꽂아놓으면 일주일 정도는 누릴 수 있다. 말려서 포푸리로 해두기에도 좋다고 하는데, 아직 못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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