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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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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쑤 May 21. 2017

블루애로우: 당연하지 않은 흰 머리

얼마 전 양재시장에 가서 화분을 고르고 있는데, 마침 가게에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 가게 청년이 내게 자꾸 말을 시켰다. 내심으로는 오늘 내가 좀 어려 보이게 입어서 남자한테 어필하나, 하면서 ‘어린’ 외간 남자가 내게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이 과히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계산대에서 화분값을 계산하던 그 청년 왈, “누님, 제 머리가 딱 누님 머리 같았어요. 저는 아예 탈색을 해요. 누님도 염색 좀 하시면 훨씬 어려보이실 텐데요”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 청년이 내게 자꾸 눈길을 주었던 이유는 염색을 하지 않아 반백인 나의 머리가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나 보다. 흰 머리가 남자의 시선을 끌기도 하는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있는데, 청년 옆에 있던 좀 더 나이든 가게 직원이 한마디 거들길, “이제 사모님 애가 학교 들어갈 때쯤 됐을 텐데, 엄마가 그렇게 늙어보이면 애가 싫어하지 않아요?”라고 했다. 나는 웃음으로 대충 대답하고 계산을 마치고 돌아섰다. 몇발짝 걸어가는데 그 청년이 화분을 몇 개 안 가져갔다면서 들고 뛰어왔다. 기껏 고른 화분을 챙겨오지 못한 것을 보니 나는 그들의 말에 순간적으로 당황했었던 것 같다.

이 날 사온 식물이 블루애로우이다. 주먹만한 비닐포트에 68센티나 되는 식물이 심겨져 있었다. 아무리 길쭉하고 좁게 자라는 나무라고 해도 이 비닐포트는 너무 작은 거 아닌가 싶었다. 블루애로우는 이름 그대로인 식물 같다. 누군가가 은청색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약간 흑백처리가 된 듯한 초록빛의 식물인데, 가느다란 몸통 가지를 중심으로 이쪽저쪽 어긋나게 잎이 나지만 그 폭이 아주 좁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화살모양처럼 끝이 뾰족한 길쭉한 모양이다.


양재시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 블랙애로우를 보면서 애가 왜 이리 부실한가 싶은 생각이 자꾸 든다. 왜 다른 식물들처럼 양옆으로 가지를 쭉쭉 뻗으면서 풍성한 몸집을 가꾸지 못하는 걸까 싶었다. 참 멋진 식물이라고 생각해서 사실은 작년에 하나 샀었다가 그 때 마침 집을 지어 살게 된 친구에게 정원에 심으라고 선물해주기도 했던 식물이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하나를 들이면서, 나중에 내 정원이 생기면 심어야지라는 희망을 담았던 식물인데, 이 날은 갑자기 멀대같이 느껴졌고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막대기를 꽂아놓은 것 같기도 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여자몸을 보고 어깨가 둥글하고 엉덩이가 푸짐하고 하면 애를 잘 낳는다는 둥, 살집이 없이 마르고 어디가 어떻게 생겼으면 애를 잘 못 낳는다는 둥 하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런 어르신들의 분석에 의하면 블루애로우는 애낳기는 영 글른 몸이다. 새끼를 치려고 혹은 번식을 시키려고 들인 식물이 아니라 그저 그 모습이 좋아서 베란다에 두고 보다가 잘 키워서 언젠가는 나의 정원에 진정한 정원수로 심어주려고 한 식물이었는데, 양재시장 남성들이 들이민 프레임에 예상치 못한 느낌이 생겨버렸다.


나의 개인적이고 소소한 경험에서 카메라 줌을 한껏 당겨 유명인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작년에 영국 총리가 된 테레사 메이가 떠오른다. 메이 총리는 영국 총리라는 본연의 업무와 행보 못지 않게 그녀 특유의 패션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예전에 인기가 많았던 미국 드라마 ‘섹스앤더시티’에서 주인공이 구두에 열광했던 것 못지 않게 메이 총리는 본인 스스로도 구두 수집가라고 인정했을 만큼 다양하고 스타일리쉬한 구두를 즐긴다.


그런데 메이 총리가 영국의 총리로 결정되는 데에는 사실 또다른 여성 정치인의 ‘말 실수’가 한 몫 했다. 당시 총리 후보 경선에서 메이 총리를 바짝 쫓고 있던 안드레아 리드섬이라는 당시 에너지차관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아이가 없는 메이보다 엄마인 자신이 총리로서 자질이 더 낫다”라는 말을 하고 만 것이다. 이 발언은 일종의 공분을 샀고, 얼마 후 리드섬은 경선을 포기하였으며, 그 결과 메이가 총리로서 확정되었다.


그런가하면, 영국의 선데이타임즈와 인터뷰를 했던 스코틀랜드의 자치정부 수반인 또다른 여성 정치인 니콜라 스터전은 인터뷰에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과거 자신의 유산 경험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았던 이유는 자녀가 없는 여성에 대한 편견을 깨고자 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데이타임즈는 그 후 “자녀 없는 여성 정치인들”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스터전을 포함한 6명의 여성 정치인의 사진을 실었다. 이 6명에는 영국의 테레사 메이 총리와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포함되었다. 한 술 더 떠서 선데이타임즈는 굵직한 글씨로 스터전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그 인용문구는 하필 “만약 누군가 내게 20년 전으로 돌아갈 기회를 부여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잡을 것이다”라는 것이어서 마치 스터전이 아이를 갖지 못했음에 후회 내지는 한을 품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영국의 45세 이상 여성 5명 중 1명은 아이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리드섬 차관의 발언과 선데이타임즈의 인터뷰 기사는 그 ‘5명 중 1명’에 달하는 모든 여성들을 슬프고 화나게 했을 것이다. 리드섬 차관의 발언이 공분을 불러왔듯, 선데이타임즈의 기사도 후폭풍이 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모 공공연구원의 발표자료에 ‘전국 출산 지도’라는 것을 포함한 일로 시끌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우리나라에서 무자녀 여성들이 겪는 일들이 어디 출산 지도 뿐일까 싶긴 하다.


아이가 없다는 것.

이것은 결핍이자 미완성이자 비정상이자 불완전함을 종종 뜻한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하다는 정서가 사회와 문화에 존재한다. 흰 머리가 돋아나면 당연히 염색을 해야 하는데 나처럼 반백이 되도록 염색도 하지 않고 흰 머리를 드러내고 다니는 것에 주변 사람들이 농담이든 충고든 한 두마디씩 건네는 것처럼.

작년 봄에 처음 들인 작은 필레아 페페로미오이데스는 새끼 자구들이 자꾸만 올라와서 이제 그 개수가 엄청 늘어났다. 어찌나 잘도 올라오고 잘도 자라나는지, 식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이렇게 새끼가 자라나면 그 기쁨이 참 크다. 경이롭고 신통하여, 어머어머, 하는 감탄사가 연발되고 수시로 베란다를 들락거리며 그 성장과 변화에 즐거워 하게 된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새끼들을 보는 즐거움이 정말 쏠쏠하다. 얼마 전 자구들을 어미로부터 분리해서 작은 화분들에 독립시켜줬는데 한 스무개 남짓은 될 것 같다. 옮겨심고 난 후 이 많은 새끼들을 어쩌나 싶기도 했는데, 조금 더 키워서 올 가을에 팔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고는 신이 났다. 내가 사는 집 근처에는 토요일 벼룩시장이 열리는데 거기에 자리를 잡고 팔아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가하면, 율마처럼 새끼치기가 힘든 식물도 있다. 이렇게 했더니 뿌리가 나더라 하면서 삽목의 비결을 얘기하는 블로거들도 많지만 나는 아직 성공해보지 못했다. 다른 생화들이 일주일 정도면 시드는 데 반해서, 율마는 가지를 잘라서 꽂꽂이하듯 물병에 꽂아두면 얼추 한달 이상은 간다. 연둣빛 초록으로 집안을 장식하는 소품으로서는 제격이지만 도통 뿌리는 잘 나지 않는다. 식물을 업으로 키우는 농원 같은 데에서는 피트모스도 쓰고 생장촉진제도 쓰고 온실 같은 공간도 조성해주고 하는지 삽목으로 율마를 쑥쑥 키워낸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성공을 못했다. 이달 초 다시 한 번 삽목을 했고, 열개쯤 되는 율마 줄기들을 꽂아놨는데 어찌될지 지켜보려고 한다. 삽목한지 이제 보름 정도 되었는데, 뿌리가 내렸는지 아닌지는 아직 모른다. 가치지기로 삽목이 가능하다는 블루애로우도 아마 율마 못지 않은 번식의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마 율마 삽목을 시도하듯 언젠가 블루애로우도 한 번쯤은 해보긴 할 것 같다.


열개 남짓한 율마 가지를 삽목하고 이 중에 과연 몇 개가 뿌리를 내릴까, 아니 1개라도 뿌리가 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마치 난자를 과배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의 몸에서는 한 달에 한 개의 난자가 배란되지만,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아기 시술을 받게 되면 과배란을 유도한다. 갯수가 많아지는 만큼 확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이다. 20개 이상 과배란을 유도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난 지금까지 10개를 넘겨본 적은 없다. 그렇게 많이 배출된 난자들이 어찌되는지, 생명체로 잉태되는지 기다리는 과정은 무심하게 숫자와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달력상으로는 몇 페이지되지 않는 기간이지만 잔인하게 길고 초조하고 무력하기 그지없다. 호르몬의 자연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모든 시술과 약으로 인해 몸도 힘들고 정신도 예민해지지만, 그보다 더 힘든 것은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의 과정에서 당사자들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압도적인 것이 아마 임신 테스트기 사용일 것이다. 일주일이나 열흘 후면 자연스레 알 수 있을 결과를 차마 기다리지 못하고 하루에도 너댓번 씩 뜯어 소변을 적시고 몇 분간 손톱을 물어뜯으며 결과선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혹시나 희미한 흔적이라도 나타나지 않나 하고 하얀 여백일 뿐일 테스트기를 노려본다. 하도 노려봐서 눈이 침침해지면 눈의 피로를 풀어주고 다시 노려본다. 테스트기가 불량이라서 나오지 않아야 할 선이 나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나는 여러번 임신을 했었다. 결혼 4년차인 한국 나이 41세의 나는 무자녀이다. 앞의 두 문장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제주도 날씨같은 감정의 곡선과 신체의 변화들이 있었다. 한동안 출근하듯 드나들던 병원을 이제는 가지 않고 있는데, 어느 병원은 ‘공장’이라더라, 라면서 왜 병원에 다시 가지 않느냐는 엄마의 꾸지람 섞인 걱정이 점점 빈번해지고는 있지만 솔직히 나는 이제 잘 모르겠다.


율마의 삽목도 성공하고 블루애로우의 삽목도 성공해서 미니 화분에 미니 나무가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신나고 기분좋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역시 안 되는군, 하면서 말라 고꾸라진 삽목 가지들을 뽑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신체의 ‘출산 시계’는 거의 자정을 향해 가면서, 잠 못드는 흰 새벽에 벽 시계의 초침소리가 째깍거리는 것이 유난히 크게 들리면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처럼 이따금씩 나를 고민하게 하는데, 앞으로 자연스럽게 혹은 의술의 힘을 빌어 내게 아이가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무자녀 여성으로 계속 살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입양을 할 수도 있다.


다만, 내가 내 스스로에게 다짐하고자 하는 것은, 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쪽의 인생이 되든 그것은 결핍이거나 불완전함이나 비정상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자 선택이라는 것이다. 어느 책에서 나왔던 말처럼, 아이 없음 (childless)이 아니라 아이로부터 자유로움 (childfree)이다. 무엇이 당연한 것인가, 무엇이 완전한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무도 알 수 없고, 타인이 혹은 사회가 내게 강요할 수도 없다. 또, 남과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하여 불안해하지도 말고, 다수와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하여 소수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도 말자는 것이다.


며칠 전 ‘다시 쓰는 입양의 정의’라는 칼럼을 읽게 되었는데 크게 공감했다. 3살된 자신의 아이를 힘든 병으로 떠나보낸 후 한 아이를 입양한 여성이 쓴 칼럼이었다. 갓난쟁이 때 입양한 아들이 이제 십대의 소년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국어사전에 나온 ‘입양’이라는 단어의 뜻을 보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 국어사전에 나온 입양의 뜻은 ‘남의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삼는 것’이었다. 아들은 그 사전을 낸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입양이란 단어의 뜻이 잘못되었다고, 남의 아이를 자신의 자식으로 삼는 것은 입양이 아니라 “납치”라고 분명히 했다고 한다. 아들의 전화를 건네받은 여성은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혹시 대안아 될 만한 견해가 있는지 질문을 받고는, 자신이 생각하는 입양의 정의는 ‘아이에 대한 친권을 옮겨오는 법 절차를 거쳐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칼럼을 읽고,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길 지하철을 타면서 습관처럼 들여다본 스마트폰을 통해 읽게 된 칼럼이었는데, 퇴근길 내내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칼럼 생각이 맴돌았다. 내가 그 칼럼을 쓴 분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던지, 입양이라는 단어의 뜻을 당장에 고쳐야한다던지 하는 격한 마음이라기보다는, 내가 지금까지 함부로 듣고 보고 말하던 입양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깊고 절절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철주의 “그림 보는만큼 보인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1900년대 초반에 오슬로 국립미술관이 에드바르 뭉크의 ‘그 다음날’이라는 작품을 구매하여 미술관에 소장 및 전시하자 당시 비난 여론이 엄청 났었다. 뭉크가 이 그림을 발표했을 때, 젊은 여성이 술에 취하여 단정치 못하게 흐트러진 옷과 벌러덩한 자세로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에, 즉 그 건전치 못함에 당시 많은 사람들과 비평가들이 혀를 끌끌 차면서 비난을 했었는데, 그런 불경한 그림을 매입한 미술관장에게 비난이 그대로 옮겨간 것이었다. 한 유력 일간지는 “취기에 젖은 못된 여자를 불쌍하게 볼 사람은 없다. 설혹 쉴 곳이 없더라도 국립미술관은 그녀가 쉴 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비꼬며 비난했다. 그러자, 국립미술관장 옌스 티스는 그에 반박하면서, “그녀가 깨어나면 물어보겠다. 이 곳이 쉴 만한 곳이냐고. 그러나 지금은 자게 내버려둬야 한다. 그녀가 있는 것이 미술관의 영예가 될지 치욕이 될지 아직은 판단하기 이른 시간이다”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 다음날’이라는 이 그림은 ‘절규’와 함께 뭉크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내 삶이 완전할지 아닐지는 나도 모르고 타인도 모른다. 내가 살면서 하게 되는 선택들이 매번 옳고 완전한 것인지 역시 그렇다. 내가 하지 않는 선택들이, 하지 않았음으로 인해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인지 역시 그렇다. ‘후회하게 될지 모른다’는 압박으로 내 현재의 판단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온전함이다. 내가 스스로의 판단과 만족감으로 온전하게 내 삶을 이루어가고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삶보다 백 배 천 배 낫다. 나는 여전히 반백의 내 머리가 좋고, 블루애로우도 멋져 보인다. 

[왼쪽은 문그로우, 오른쪽은 블랙애로우. 더벅머리 문그로우는 목발을 짚고 있고 블랙애로우는 문그로우의 속 깊고 조용한 동무이다. 나와 나의 남편처럼.]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블루애로우

학명: Juniperus Scopulorum ‘Blue Arrow’

영명: Juniperus Scopulorum ‘Blue Arrow’, Blue rocky mountain juniper, Blue upright juniper, Blue juniper, Blue arrow juniper, Juniperus virginiana Blue Arrow

생물학적 분류 (문/강/목/과/속): 구과식물문 ,소나무강 구과목 측백나무과 노간주나무속

원산지/분포지: 북아메리카, 캐나다, 멕시코 등지


햇빛:

정원수로 적합한 나무이겠지만 나는 베란다 창가에 놔두었고 남향 베란다의 창가라면 충분할 것 같다.


바람:

해와 바람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바람이 아닐까. 반그늘에서도 자라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실내에 키우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역시 솔솔 바람이 필요한 식물인 것 같다.


물주기:

건조함에 강한 식물이라고 한다. 땅에서 자라는 경우 가뭄도 잘 견디는지라, 물은 자주 주는 것 보다는 좀 인색하게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한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는데, 흙이 마르면 식물의 잔뿌리가 왕성하게 자라는 효과가 있어서, 죽지 않을 만큼 물을 말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식물 고수이거나 자주 식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방법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물을 말려서 잔뿌리를 키워내려다가 식물과 작별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으므로,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


내한성/월동:

우리나라 한겨울 추위에도 노지에서 월동한다니, 베란다에서 키워도 아무 문제 없겠고 나중에 마당 정원에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성장:

인터넷에서 20년 자라면 키 20미터 폭 50센티로 자란다는 설명을 보았다. 비교적 빨리 자라는 속성수에 속하는 것 같은데, 역시 이름 그대로 화살과 같은 삐죽한 모양이어서 아무리 자라도 풍성함과는 거리가 먼 식물인 것 같다. 가지치기는 따로 해주지 않아도 길죽한 삼각형 모양을 계속 유지한다고 한다.


번식:

가지를 잘라 삽목을 한다고 하는데 나는 내년쯤 시도해 볼까하는 생각은 들지만, 번식 자체에는 별 관심은 없다.


매력포인트:

얇고 곧게 자라는 나무는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올곧은 자태이고, 삐죽하니 촘촘하게 자라는 잎들은 은청색의 고고한 색감이다. 가만히 잠시 바라보기에 더 없이 만족스러운 모습이다.


유의사항:

병충해는 거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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