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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을읊다 Mar 31. 2024

사과하는 마음

3월에는 조직 개편이 화두였다. 이 회사를 다니는 6년 동안에는 본 적이 없는 대대적인 규모의 조직개편이었는데, 이전부터 계시던 분들 말을 들어보면 그 이전에도 이런 조직개편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속한 조직은 사실 다른 조직과 비교해 보면 그렇게까지 변화가 크지는 않은 편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직장 일부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나는 당연히 내 자리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내 직속 리더와도 그런 내용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몇 번 의사 결정이 엎어지더니, 결과적으로 나는 조직장 자리를 유지하게 됐다. 내가 맡고 있는 조직도 인원이나 업무 변동 없이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아직 결과가 확정되기 전, 내가 조직장으로서 일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나는 조직장 이긴 하지만 실무 일을 내려놓지 못했다. 조직 특성상 내가 맡고 있는 실무를 누구에게 전적으로 물려주고 관리 일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직장 자리에서 내려온다고 했을 때, 연차 대비 실무 일이 충분치는 않았다. 일을 벌이려면 뭐라도 얼마든지 벌일 수 있지만, 그게 지금 이 조직에서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어필할 논리는 약했다. 나는 좀 더 내 업무 영역을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개발이라던가. 개발 업무를 하려면 일단은 자바 언어 공부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래도 한 해 정도 평가 결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부지런히 공부하면, 내년에는 아주 작은 것이라도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우리 조직에는 실력 좋고 주니어를 여럿 키워낸 경력이 있는 개발자가 있다.(앞으로 그를 A라고 하자.) A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직 개편의 진행 경과를 공유하면서 A에게 슬며시 이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아무래도 조직장 자리를 내려놓으면 다른 일을 좀 더 해야 할 거 같다고. 가능하면 개발이라도 해보고 싶다고. A는 개발을 하는 것 보다는 부동산으로 파이어 하는 게 더 빠를 거라고 가볍게 대꾸했다. 마음에 뭔가가 쿡 찔린 느낌이 들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그냥 그런가, 하고 넘겼다. 하지만 내가 너무 나이나 연차가 많아서 하는 말인지, 개발 일은 어렵고 힘든 일이라 걱정해서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저 '나'이기 때문에 못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인지, 곱씹을수록 불쾌해졌다. 동시에 혹시 내가 한 말이 너무 개발 업무를 가볍게 보는 것처럼 들려서, A가 순간적으로 욱해서 한 말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사과해야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A가 쉽게 다른 사람을 깔보거나 그런 방식으로 화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평소와는 좀 다른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혼자 삭히거나 수동적인 공격을 하는 대신, 직접 그 의도를 묻는 것으로. 


다음 날 잠깐 물어볼 것이 있다며 A를 불렀다. 사내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면서 말투나 표정을 살펴보는데 평소와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내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연습했던 말을 꺼냈다. 내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했을 때, A가 이러저러하게 답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러저러한 생각이 들어서 속상했다고. 혹시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하셨느냐고. (돌아보니 나는 정확히 SBI 피드백 모델대로 말했더라.) A는 놀라고 당황한 눈치였다. 개발 업무를 해보고 싶다고 한 내 말이 농담인 줄 알고 개발자 밈을 인용하여했던 농담이었다고 했다. 당연히 개발 업무를 하실 수 있다고,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A가 답했다. 진심이라고 느껴져 마음이 훅 풀렸다. 우리는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를 마치고 나는 말을 꺼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조금 놀란 것은 자리로 돌아온 이후, A가 메신저로 장문의 글을 보냈을 때였다. 내 이야기에 당황한 나머지 농담이라고만 이야기하고 제대로 사과하지는 못한 것 같다며, 구구절절하다고 느껴질 만큼 긴 사과의 내용이었다. 더불어 앞으로 주의를 하겠지만 혹시나 또 이렇게 자신의 말에 불쾌감이 들 때면 꼭 의도를 물어봐 달라는 말과, 그렇게 물어봐 주어서 감사하다는 말도 있었다. 이미 충분히 마음이 풀어져 있었지만, 그런 사과의 글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실수를 제대로 반성하는 사람이 드문 요즈음,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내 복이라는 생각도 들고, 의도를 물어보는 쪽을 택한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다. 그 일은 힘든 일 많았던 3월 한 달을 그래도 씩 웃으며 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기억으로 남았다.


여담으로 A는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지, 한 번은 산책길에 다른 동료에게 소소한 농담을 한 후에 또다시 장문의 사과의 글을 남긴 적이 있다. 돌이켜 보니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A의 농담에 전혀 기분 상하지 않았던 그 동료는 깔깔 웃으면서 A는 정말 바른 사람이라고 평했다. 나 또한 그 이야기를 듣고 실컷 웃었지만, 이제는 A가 너무 심하게 자기 검열을 할까봐 걱정되기도 한다. 개발 업무를 배우는 대신 조직장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으니, 다음 A와의 1on1 때는 그 이야기를 꺼내봐야 겠다.




* SBI 피드백 모델 : 동료에게 피드백을 줄 때 어떤 상황(Situation)이었는지 설명하고, 그때 일어난 행동(Behavior)을 이야기한 후, 그 행동이 미친 영향(Impact)을 설명하는 피드백 모델이다. 부정적 피드백을 줄 때나 긍정적 피드백을 줄 때나 모두 도움이 되는 방식이다.


긍정적 피드백 예시) 일전 주간 미팅에서 회식 일정 잡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요.(S) Z가 그때 B가 낸 의견에 열렬하게 리액션해주셨던 것 기억하시나요?(B) Z의 그런 좋은 반응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회의 시간에 자기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게 돼요.(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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