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서
일요일 오후 4시 무렵, 와세다 대학교를 찾았다. 와세다 역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다. 아직 쌀쌀한 날씨였지만, 학교를 둘러싼 담 너머로 보이는 나무에는 부분 부분 벚꽃이 피어 있었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벚꽃이었다. 감탄스러웠지만 사진을 찍기 위해 발을 멈출 수도 없었다. 목적지인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은 오후 5시까지만 운영을 하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가 보여주는 최단 거리를 따라 이동하다 보니, 학교 안을 통과하지 않고 바깥으로 돌아 무척 뒷길 같은 좁은 통로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바로 앞에 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 입구를 바라볼 때 왼쪽에는 고풍스럽고 거대한 건물이 있었는데, 도서관은 하얗고 나지막했다. 의도한 대비인 걸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자 무척이나 깨끗하고 정갈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인터넷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을 검색하면 처음 나오는 바로 그 모습, 나무 계단과 그 계단 위로 나무로 된 아치형의 곡선, 그리고 계단 양쪽에 책장이 있는 장면이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하루키가 영향을 받았거나, 혹은 하루키로부터 영향을 받은 책이라고 본 것 같다. (확실치는 않다.)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1층의 한 편을 둘러보니 하루키의 작품이 시대별로, 그리고 여러 언어로 번역된 버전이 진열되어 있었다. 명색이 도서관이니까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지만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요일이기도 하고, 관광객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니 맘 편히 앉아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저렇게 벽 한쪽에 양 사나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테이블이라면, 꼭 한 번은 거기에 앉아서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싶을 것 같다.
2층에는 하루키와 인연이 많은 안자이 미즈마루 화백의 그림 전시가 있었다. 그 특유의 '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들이 여러 사이즈로 모아져 있어, 재미있고 따스한 기분이 들었다. 하루키의 글과 미즈마루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그림책 <후와 후와>의 그림도 볼 수 있었고, 눈 내리는 풍경을 그린 그림 앞에서는 한참 시선이 머물렀다. 모두 단순한 선, 밝고 또렷한 색감, 유머러스한 분위기의 작품들이다. 결국 카페에서 팔고 있던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으로 만들어진 핀 배지와 엽서와 키링 같은 것을 사오고 말았다. 2층에서 지하 1층 카페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했는데, 2층 엘리베이터 입구 쪽 벽에는 유선 전화기와 'NEB'라는 글자가 그려진 티셔츠 그림이 있었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 나오는 그림이다. 그런 걸 하루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도안으로 만들어진 티셔츠 굿즈가 있었다면 그것도 분명 사왔을 것이다.
지하 카페에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카페 한편에는 하루키가 운영하던 재즈 카페 '피터 캣'에서 사용했다던 그랜드 피아노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걸 찾아낸 걸까?) 한 섹션에는 하루키가 일하는 공간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는 방이 있었는데,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그 앞에는 몇 개의 테이블이 있어, 거기서 커피 마시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있어서 얼른 사진만 찍고 물러 나왔다. 기왕이면 좀 더 보기 편하게 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여긴 기본적으로는 와세다 대학교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니까, 내가 방해하는 사람이 맞다. 나는 조금 민망한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1층에서 본 나무 계단을 올랐다. 종일 걷고 서 있던 탓에 그즈음에는 계단 양쪽의 책을 꼼꼼히 볼 기력이 없어서, 꼼꼼히 번역기를 돌려 보는 남편의 등 뒤에서 책을 보는 시늉만 했다.
마지막으로 1층의 한쪽 편에 위치한 '음악실'에 들어갔다. 한쪽 벽에는 LP 재킷이 진열되어 있고, 소파와 의자가 있고, 그리고 재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스피커를 마주 보고 잠시 앉아서 쉬었다. 뜻밖에도 오래 머물러도 좋다고 속삭이는 듯 편안한 소파여서 살 것 같았다. 두 개의 북셸프 스피커 사이의 벽에는 2층과 마찬가지로 안자이 미즈마루 화백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우리 집 TV 사이즈(75인치) 정도쯤은 되어 보였고, 특이하게 러그 같은 재질이었다. 그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며 잘 알지도 못하는 재즈를 듣는데, 그때 일본 여행을 오기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음질로 울리는 음악이 몸을 살며시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에서 적어도 두 시간은 보냈어야 했다. 다음에 또 온다면, 그때는 꼭 <양을 쫓는 모험>을 들고 와야지. 그래서 책과 음악으로 마음을 뜨끈하게 데워 가야지.
서너 곡쯤 듣다가 아쉬운 마음으로 오츠카로 이동하기로 했다. 별생각 없이 구글 지도를 의지해서 움직이다 보니 '도덴 아라카와선'을 타게 되었는데, 노면 전차였다. '도쿄 사쿠라 트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여긴 일본이니까 트램보다는 노면 전차라고 부르는 게 더 정감이 간다. 개찰구가 없어서 어떻게 요금을 내야 하는지, 스이카는 사용 가능한 건지 두근 두근해 하면서 열차를 기다렸다. 곧 한 량 짜리 자그마한 차가 들어 왔다. 버스와 같은 시스템인 것 같았다. 입구에서 스이카를 태그하고 자리에 앉자 승무원이 땡 하고 종을 치고 출발했다. 내릴 역에서는 정차 버튼을 누르면 되었다.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내릴 역의 문이 열리면 그때 일어나서 재빠르게 내렸다. 노면 전차를 타고 있으니 괜시리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나른하고 반짝이는 일요일 늦은 오후의 햇살이 창 너머로 비췄다. 마음이 간질 간질한,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