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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김미생 May 14. 2020

NGO 홍보인, 김미생은 오늘도 아프리카 출장 중

세상의 온도가 1℃ 높아지길 꿈꾸는 커뮤니케이터

"우리 기관에 왜 입사하고 싶으세요?"


"대학시절 기자를 꿈꾸며 언론/홍보를 전공했습니다. 제가 쓴 글과 사진으로 세상의 이야기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에서 행복을 느꼈습니다. 세상에서 소외되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아이들의 삶을 전하는 커뮤니케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언론사 기자 실습, 홍보대행사 인턴, 은행 인턴을 거쳐 두드리게 된 NGO 기관. '적당히 이름 있는 대학을 나와서 적당히 돈 잘 버는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다'는 결코 적당하지 않은 꿈을 꾸던 내가 이름부터 비영리인 NGO에 원서를 넣은 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NGO가 무엇인지, 국제구호기관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모른 채 무언가 선한 영향력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으로 보았던 면접. 대학시절부터 커뮤니케이터가 되고 싶어 여러 대외활동과 공모전, 인턴 경험을 통해 쌓아 온 노력들을 예쁘게 봐주셨는지 합격 전화를 받게 되었다.


"과장님, 다른 면접자들은 봉사활동 경험도 많고 NGO에 들어오고 싶은 열정도 커 보였는데 왜 제가 뽑혔어요?" 나중에 우연히 면접을 보셨던 과장님께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매우 심플했다.


'너는 NGO에 대한 환상이 없어 보였어.'


선한 비전과 방향을 향하지만, 여기도 전문성을 갖고 때로는 치열하게 일해야 하는 '직장'인데 좋은 일, 착한 일을 하는 곳이라는 기대가 큰 친구들은 금세 실망하거나 지쳐서 떠난다고 하셨다. NGO라서가 아니라 좋은 홍보인이 되고 싶어서 지원했다는 내 이야기가 맘에 드셨다고 하니 감사한 일이다.


통통하고 앳된 얼굴로 사원증을 목에 걸었던 2015년 5월 1일. 그렇게 나의 NGO 생활이 시작되었다.



@2018, 방글라데시

‘주말에 볼래?’

“안돼. 나 이번 주에 출국이야”

‘또 출장 가? 이번엔 어디야’


입사 후, 지구촌 곳곳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3개월에 한 번 꼴로 몸을 실었던 비행기. 가까운 나라 베트남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케냐, 말라위, 몽골, 방글라데시, 인도 등 살면서 한 번 가볼 수 있을까 싶은 낯선 나라까지 전 세계로 향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일정이 일시 중단된 상태이지만, 홍보팀에서 일하는 나는 다른 부서보다도 출장을 떠날 일이 잦은 편이다. 무슨 일을 하러 가느냐고 묻는다면 3가지로 정리된다.


1) 언론과 방송 매체를 통해 지원이 필요한 혹은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한 지구촌의 이슈를 알리기 위해 기자, PD 등과 함께 취재를 간다.


2) 우리 기관을 통해 후원을 하고 계신 후원자분들에게, 실제 후원금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 지를 보여드리기 위해 동행을 한다.


3) 오프라인 매거진, 블로그, 홈페이지, SNS 등에 실리는 글 작성과 사진/영상 콘텐츠 수급을 위해 현지 국가 주민과 아이들을 만나고 인터뷰한다.


출장을 가기까지 짧게는 3주에서 길게는 두 달여의 사전 준비를 한다. 비자 발급부터 촬영 및 취재 허가를 받기 위한 문서 준비, 취재 일정 조율을 위한 현지 본부와의 스카이프 콜, 비행기 티켓팅, 숙박 예약, 환전, 3중(현지어-영어-한국어) 통역 준비까지. 몇 번이고 점검을 해도 예기치 못한 변수들은 생겨나기 마련이기에, 낯선 곳으로의 출장은 아직 긴장이 앞선다. 언제 적응이 될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슴이 뛰는 이유는 무엇일까.




2020년 5월 1일,

입사한 지 꼬박 5년이 채워지던 날.

나 자신에게 묻게 되었다.


'미생아, 너에겐 무엇이 남겨졌니?'


생애 첫 해외출장에서 만난 베트남 소녀가 그려준 내 얼굴 그림. 국제선 비행기 경유 2번 → 국내선 경비행기 → 자동차 오프로드를 거쳐 22시간의 여정 끝에 도착했던 아프리카 작은 마을의 꼬꼬마들. 공부를 계속하고 싶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선 낯선 이와 결혼을 해야만 한다며 함께 울었던 19살 케냐 소녀. 전쟁으로 눈 앞에서 가족을 잃고 피난을 떠나온 90만 명의 사람들이 모인 미얀마 난민촌의 빼곡한 임시 천막들.


특별한 듯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마음에 새긴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간다.



@2019, 말라위


꿈이 생겼다.


그곳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나 둘 기록해야겠다는 꿈. 혼자만 알고 있기엔 너무나도 뭉클한 혹은 너무나도 가슴 아팠던 이야기를 전해야겠다는 꿈. 누군가 나의 글을 본다면, 조금이라도 그 아이들의 아픔에 공감해주길 바라는 작은 욕심을 담아서.


누군가는 말한다. 이제는 지겹다고, 그만 하라고. 아프리카 얘들이 밥을 못 먹는다는 얘기는 빈곤 포르노라고. 우리나라도 살기 힘들다고. NGO도 사회복지사도 못 믿겠다고.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심장이 쿵 주저앉는다. 소박한 월급에 빛도 명예도 없는 이 일을 나는 왜 하고 있지? 현타가 오기도 한다. 어쩌면 지금부터 차곡차곡 써내려 갈 기록들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세상의 온도가 1도씨 높아지길 꿈꾸는 이유’에 대한 답이 되어줄 것 같은 기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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