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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김미생 May 14. 2020

슈퍼모델을 꿈꾸던 19살 케냐 소녀 ‘미스 카쿠마'

케냐 난민촌 이야기/1편


수많은 해외 출장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


누군가 나에게 이 일을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은 아이.


열아홉 살 ‘미스 카쿠마’와의 인연

2018년 10월로 거슬러간다.




케냐의 국내선 경비행기


인천 공항 → 에티오피아 공항 → 케냐 수도 나이로비 공항을 거쳐, 다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로드워 지역에 도착. 거기서 오프로드로 4시간 달려 도착한 카쿠마(Kakuma) 마을.


22시간의 고된 여정 끝에 도착한 숙소는 그야말로 처참한 컨디션이었다. 여러 나라의 어려운 지역으로 출장을 다녀 왠만한 환경에는 익숙한 나로서도 말문이 막히는 광경. 빗물을 받아 저장해 두고 쓰기에 찬물/더운물 온도 조절도 안되고, 전기는 하루에 3시간만 들어온단다. 와이파이는커녕 핸드폰 충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방이라기엔 그저 네모난 콘크리트 공간에 침대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28도를 웃도는 날씨에 그나마 하나 있는 창문을 열면 맞은편 낙타 농장에서 냄새가 풍겨온다.


‘망했다. 쉽지 않은 7박 8일의 출장이겠구나’


먼 길을 달려 이곳에 온 이유는, 아프리카 난민촌 특집 기사를 위한 기자 동행 취재였다. 고향을 떠나와 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사연과 난민촌에서의 삶,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기관이 하고 있는 구호활동 등을 현장에서 보고 담으며 기자분들이 좋은 기사를 통해 많은 독자에게 전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아프리카 대륙 중심에 위치한 케냐의 국경에 자리한 카쿠마 난민촌(Kakuma Refugee Camp). 인접한 남수단, 우간다, 에티오피아 등 주변의 국가에서 내전, 빈곤, 종족 탄압과 같은 여러 이유로 피난을 온 18만 명의 난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까?




끝없이 황량한 오프로드 길


인터뷰를 위해 우리 일행은 한 난민촌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175cm 남짓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얼굴이 매우 작고 예쁜 여학생을 만났다. 8등신이 넘는 비율에 모델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19살인 소녀는 남수단 출신이다. 남수단은 50여 년간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오랜 내전을 치른 아프리카 국가이다. '울지 마 톤즈' 영화의 주인공인 고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로 알려진 나라 이기도하다. 소녀는 전쟁으로 부모님 두 분을 다 잃고 몇 년 전에 할머니와 동생들과 이곳 난민촌에 왔다고 한다.


공부가 참 재밌다는 소녀, 꿈이 뭐냐고 물으니 꿈도 참 많다. 세계적인 슈퍼모델도 되고 싶고 선생님도 되고 싶다고 말한다. 모델이라니, 참 잘 어울리는 꿈이다. 좋은 모델이 될 거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더니 수줍게 자랑한다. 이곳 마을에서는 학습태도와 행실이 훌륭한 여학생을 '미스 유쓰(Youth) 카쿠마'로 뽑는데, 자기가 뽑혔다고. 우리나라의 '미스 코리아'가 생각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현지 아이들과의 대화는 보통 3중 통역 과정을 거친다. 부족어가 많은 경우엔 부족어 - 현지 공용어 - 영어 - 한국어 4중 통역을 거치기도 한다. 현지 본부 직원이 현지어를 영어로 통역하면, 나는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해 동행한 기자나 후원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다시 한국어 질문을 같은 과정을 거쳐 현지어로 전달한다.


동행한 기자님과 아이의 인터뷰를 통역하던 중,

아이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며칠 전, 남수단에 사는 이모부가 여기 난민촌에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얼굴도 모르는 나이 많은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절 다시 남수단으로 납치해가려 했어요. 저와 여동생을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여기에 남아 계속 공부하고 싶다고 울며 말해도, 여자애가 공부해서 뭐하냐고 책들도 다 불태웠어요. 삼촌이 또 찾아올까 봐 무서워요."


그동안 참아온 설움을 다 쏟아내는 듯 터진 아이의 울음. 삼촌에게 소녀가 사는 곳을 알려준 건 다름 아닌 함께 사는 친할머니라고 했다. 너무 충격적이었다. 도대체 왜 친할머니가 손녀에게 팔려가는 것과 다름없는 결혼을 강요하는 걸까? 소녀의 이야기에 나도 목이 메어 잠시 통역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Now, I could know about the peace. And it makes me be united with others. With peace, we are able to live in love, happiness and harmony. Without peace, we couldn’t learn. We can be what we wanna be by education. It is the only way I could change my life.


(저는 이제 알아요, 평화가 무엇인지. 평화는 서로 다른 우리를 하나로 연합시켜줘요. 평화가 있을 때 우리는 사랑과 행복을 느끼며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어요. 평화가 없으면 우리는 배울 수 없어요. 배움과 교육을 통해서 우리는 꿈꾸는 무엇이든 될 수 있죠. 교육은 제가 저의 삶을 바꿔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소녀는 말했다. 자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학교에 계속 다닐 것이라고. 공부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어린 동생들에게도 항상 말한단다. 배움만이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소녀가 선생님이란 또 하나의 꿈을 품고 있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거 같았다.




카쿠마 난민촌 초등학교 아이들


“지포라, 왜 아이들을 결혼시키는 거야?”


소녀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현지 담당 직원이자 나의 동료인 Zipporah 물었다. (지포라는 케냐 본부의 홍보팀 직원이다) 그녀는 이런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아직도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집안의 재산으로 취급당한다. 예쁘고 어릴수록, 결혼지참금이라 불리는 소위 몸값이 높아져서 예쁜 아이는 소 80마리, 누구는 소 30마리 이런 식으로 값도 달라진다. 부모님은 먹고살기 위해서 '전통'이란 명분으로 어린 딸을 다른 집에 시집보낸다.  


조혼(Early Marriage), 18세 미만 여자아이들의 결혼은 그 피해가 상당하다.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이른 임신과 출산으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가정 학대와 폭력을 겪는 수도 상당하다. 국제기구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여아 5명 중 1명이 조혼을 한다. 어린 학생들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낯선이와 결혼한다는 게 나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세계적인 슈퍼 모델이 되고 싶다고 재잘거리던 '미스 카쿠마'의 얼굴이 떠올라 먹먹해졌다.


마음이 아프다는 나의 말에

지포라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Gene은 내 영어 이름), 카쿠마 난민촌에서 일하며 정말 많은 아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보고 들어. 내가 만약 빌 게이츠처럼 돈도 많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아이들을 모두 도와줄 수 있을 텐데.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속상해.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아이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해. 빌 게이츠는 아니지만, 지금의 내가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이니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야(That’s why I work here)


지포라의 말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내 모습에 지포라도 덩달아 눈물이 났나 보다. 우리는 한참을 같이 손을 잡고 울었다. 인종도 언어도 사는 곳도 너무 다른 우리지만, 같은 일을 하는 동료라는 뜨거운 유대감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동행하신 기자님이 기념사진을 남겨주셨다.

미스 카쿠마 소녀와 지포라와 함께 나란히 섰다.

마침 지고 있던 석양이 예쁘게 비추고 있었다.


원, 투, 쓰리, 찰칵.


이 글의 주인공인 '미스 카쿠마'(가운데)와 지포라(오른쪽)

이 한 장의 사진은,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다.


포근한 침대에서 눈뜨고 일어나 학교에 가고, 쉬는 시간엔 친구들과 어제 본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이야기를 하며 웃었던 나의 어린 날. 학원 가는 길에 떡볶이도 사 먹고, 장래희망을 쓰는 란 앞에서 뭘 해야 하나 고민했던 추억들.


열아홉 케냐 소녀는 알려주었다.

‘나의 이 평범하디 평범한 학창 시절이

모두에게 당연한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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