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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마당에서 돌잔치하던 날

by 잡곡자매

사실 둘째의 돌잔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 첫째 때도 양가가족만 모시고 간단히 치렀고, 더군다나 이번에는 가족들과 떨어져 제주로 내려와 있기 때문에 집에서 간단히 케이크에 초나 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웃분들과 모일 때면 종종 "곧 하루 돌이네요. 돌잔치는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을 듣거나 "마당 있으니 마당에서 하면 되겠네요. 10월이면 날씨 진짜 좋을 텐데" 하는 소리를 몇 번 듣다 보니 솔깃하기 시작했다.


마당에서 하는 돌잔치라니.. 그것도 가을에! 제주에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내 인생에 다시없을 이벤트였다. 그리고 돌잔치야말로 그동안 얻어먹기만 한 날들을 공식적으로나마 갚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까지 더해지며 우리의 돌잔치 준비는 자연스럽게 시작되었다.


이웃 분 중에 마침 파티 플래너인 분이 있어 10월의 어느 토요일 점심으로 날짜를 예약하고, 괜찮은 케이터링 업체를 몇 개 추천받아 검색을 시작했다. 양가 부모님께서도 멀리 수원에서, 평택에서 날아와주시기로 했고 마을 단체방에도 공지를 했다.


나는 돌잔치에 틀 영상 제작과 퀴즈에 쓸 경품 및 답례품, 떡 주문 등을 맡고, 남편은 케이터링 음식과 돌잔치 진행을 맡았다. 마당에서 먹기 편하면서도 든든하고 아이들에게도 괜찮을 식사 메뉴를 위해 업체와 몇 번의 수정을 했고, 육아하는 사이사이 남편과 함께 진행 순서와 상품, 퀴즈 등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돌잔치하는 날이 다가왔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완벽한 가을 날씨였다.

시어머니와 마당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던 중, 이웃분이 돌상을 세팅하러 오셨다. 전문가답게 어디에 상을 놓으면 좋을지 쓱 둘러보시더니 척척 돌상과 포토존을 세팅하고 인원수에 맞게 커다란 접이식 테이블과 의자도 함께 가져와 놔 주셨다.

너무나 아름다웠던 돌상


파란 하늘 아래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아기자기 꾸며진 돌상을 보니 더 설레었다. 둘째도 그날따라 밥도 잘 먹고 낮잠도 제시간에 맞춰 잠들고 일어났다.

컨디션이 매우 좋았던 둘째. 머리가 없어 더 귀여웠다.


한복을 입은 아기의 조바위에 머리숱 없는 둘째의 민머리가 자꾸 보여 온 가족이 배를 잡고 웃고, 돌상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있으니 손님들이 하나 둘 인사를 하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 어서 오세요. 편하신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모두 앉으시면 시작할게요.


하나 둘 채워지는 자리를 보며 '자리가 부족하지는 않을까', '그늘이 없는 자리는 어쩌지' 하던 걱정도 잠시, 왁자지껄한 아이들이 나의 정신을 쏙 빼놓는다.


- 어린이들은 여기 다 같이 앉으라고 자리 만들어뒀어. 얘들아 밥 먹고 나면 곧 퀴즈 하니까 맞춰서 상품 타가자!


아이들을 달래어 미리 마련해 둔 돗자리 자리로 안내한다. 유독 닮은 첫째와 둘째의 아기 때 사진 중 둘째를 찾는 퀴즈, 둘째의 혈액형, 태몽 등 퀴즈를 맞히고, 영상을 보여주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운 방송댄스를 뽐내고, 돌잡이를 두 차례 하고, 정신은 없었지만 다 함께 와하하 웃으며 돌잔치는 마무리되어갔다.


- 이제 마이크는 저를 주세요.


한 분이 남편의 마이크를 받아가셨다. 마이크를 왜 받아가시지? 하며 어리둥절하는 동안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이쪽? 저쪽? 하며 이야기를 나누더니 마당 한쪽에 커다란 전지를 하나 붙인다.

합창 대열로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니 그제야 모두가 하얀 상의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럴수가.. 상황파악을 하는 동안 어느새 작은 스피커에서 노래 간주가 흘러나온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중략...)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진성과 가성을 넘나드는 가녀린 아이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자기 앞에 마이크가 오면 부끄러워하기도 하고, 목청 높여 씩씩하게 내지르기도 하고, 몇몇은 가사나 박자를 못 맞춰 어른이 옆에서 함께 불러주기도 하면서..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목소리들이 우리 가족을 향해 노래를 한다.


"하루야, 생일 축하해!

"하루야~ 늘 건강해."

"하루야,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

"하루야, 사랑해"

"하루야! 얼른 커서 우리랑 놀아야 해."


노래가 끝나갈 즈음 간주가 흘러나오고 아이들이 하루에게 한 마디씩 전한다. 아직 아기 같은 까랑까랑한 여자아이들의 목소리와 느릿느릿 허스키한 남자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눈앞이 뿌예진다. 아이들의 여린 목소리는 항상 마음을 울컥하게 한다. 처음에는 분명히 웃으며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있었는데 막바지에는 눈물을 참느라 간신히 휴대폰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10월의 어느 멋진~~ 하~~ 루~~(다 함께)

하루야 사랑해~~


마지막에 아이들이 입을 모아 부르며 노래가 끝났고, 참았던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 턱까지 내려왔다. 화장하고 원피스까지 차려입고 눈물 콧물 범벅인 내 모습에 감사하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뒤돌아 얼른 테이블 위에 있는 휴지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나 대신 옆에서 양가 부모님들이 "아유..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목소리로 인사하시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서 웃는 목소리가 들리며 손님들이 나를 찾고 하루의 돌반지를 껴보자며 작은 종이가방을 꺼내셨는데, 이후로는 사실 어떻게 포장을 열었는지, 누가 반지를 껴줬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누군가 찍어준 영상을 보고서 '맞다. 반지도 선물 받고 끼워주셨었지.' 하고 기억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몇 달 동안 몇 번이나 돌잔치 때 찍힌 영상을 돌려보았다.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나서 글을 쓰다 멈추고, 쓰다 말다 했다.

아휴. 만난 지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이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나 울리다니. 내가 뭐라고.. 우리 가족이 뭐라고.. 다들 바쁜 와중에 이렇게 많은 아이들을 대동해 연습하고 몰래 준비했을 생각을 하니, 긴장한 자세로 목청 높여 열심히 노래하던 아이들 모습을 보면 자꾸만 눈물이 났다.


이 날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진다. 쨍한 햇볕에 아이들이 눈부셔서 눈을 잘 못 뜨던 것도, 둘째가 돌잡이를 할 때 다 같이 와하하 웃었던 것도, 서로 손을 들며 퀴즈를 맞히고 좋아하던 모습도,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서서 노래를 불러주던 그 장면도.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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