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데이 에세이 27. 아동학대
극단 <공상집단 뚱딴지> 의 《차마, 차가워질 수 없는 온도》라는 연극을 봤다.
극은 2020년,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회의 소통이 단절된 때, 학대를 받던 아이들이 2040년에 어른이 되어 자신의 기억을 풀어놓는 형태로 진행된다. 어떤 이는 그 학대의 경험 때문에 약자에게 강함을 증명하려는 갑질을 하고,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력으로 할머니를 잃은 아이는 자신의 몸을 부정하는 트랜스젠더가 된다. 어떤 이는 학대를 막기 위한 전문 신고자 역할을 하면서도 동생을 두고 자신만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에 환각에 시달린다. 정서적 학대에 시달렸던 마지막 화자는 자신을 집안에 가두는 식물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점을 가지고 있는 화자가 결국 학대에 시달리고 있는 다른 아이를 구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 배우들의 눈빛에서 어렸을 때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어린 영혼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동학대는 우리 모두가 분노하는 범죄다. 이렇게 모두가 분노하는 범죄는 흔치 않다. 왜냐면 사람들은 '세상이 공정하다'라고 생각하다고 생각하고, 범죄를 당하는 사람이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공정한 세상 가설(just-world hypothesis)'이라고 말한다.
1966년 미국 사회심리학자 멜빈 러너는 72명의 여성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후, 이유도 없이 잔인하게 전기 고문을 받는 여성을 각각 보여줬다. 그리고 한 그룹에는 고문을 그만두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줬고, 다른 그룹에는 주지 않았더니 권한이 없던 그룹의 사람들이 고문받던 여성의 외모나 성격을 훨씬 나쁘게 기억했다고 한다. 이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이 세상을 공정한 사회로 인식하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봤을 때 불편한 마음으로 해소하기 위해, 피해자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고 사건을 재해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공정한 세상 가설'이 그저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은 현실세계에서 착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심지어 피해를 입는다손 치더라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묵묵히 참아가며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런 사회에서 마냥 '억울'한 범죄 피해자들은 존재하면 안 되는 이질적 존재들이다. 결국 범죄 피해자들을 향한 비난과 경멸은 나는 그럴만하지 않으니 피해를 당하지 않을 거라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게 하고, 일반 대중들에게 사회에 대한 믿음을 쌓는다. 이 같은 ‘피해자 비난’ 현상은 제3자나 가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일어난다고 한다. 피해자들 역시 자신이 범죄를 당한 이유가 자신의 특정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 행동만 하지 않으면 그 공포를 벗어날 수 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는 자기 합리화의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아니 잘못한건 가해잔데, 피해자가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다.
극에서도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바꾸면 부모(보호자)가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아이들이 배가 고파 칭얼된 것, 자신을 괴롭히는 양모에 대해 이야기한 것, 다그치는 어른들에게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 것 등등... 극에 나오는 그들의 잘못은 그냥 가해자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통계는 좀 더 잔인하다. 매년 아동학대로 숨진 아이들의 1/3은 영아기의 아이들이다. 그들의 죄는 아마 본능만큼 운 것 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한 번 더 안아주고, 먹을 것을 줬으면 그들이 그렇게 심하게 보챘을까.
그런데 이런 공정한 세상 가설을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누가 봐도 피해자가 억울한, 즉 재해석이 불가능한 아동학대 같은 범죄를 보면, 사람들은 '가해자'가 특이 하고, 정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절대 악인일 거라고 상상하게 된다. 즉 굉장히 독특한 케이스인 경우이고, 나와 관계가 없는 뉴스적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마음놓고 그의 '악행'에 치를 떤다. 아마 그래서 TV에서는 묘사되는 아동학대 가해자들은 알코올 중독이나 사이코패스적인 성향, 또는 폭력이나 무식함 등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학대 가해자들은 실제로 직업이 무직이거나 정확한 직업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통계적으로는 가해의 원인으로 볼 수 있는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성이 없었다. 다만 학술적 연구를 통해 스트레스가 강해지면 학대가 좀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경향성만 밝혀졌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지난해 우리의 마음을 모두 아프게 했던 정인이 사건의 가해자 양부모 역시 사회적으로는 사람 좋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런 끔찍한 신체적 학대가 아니라도, 방임과 정서적 학대 역시 무서운 학대이며 생각보다 우리 주위에 많이 일어나고 있다. 이웃 뿐만 아니라, 자신조차도 아동에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가 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더욱 경계해야 한다.
코로나 19 이후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지 못하면서 학대 신고 건수가 많이 줄었다고 한다. 과연 없어진 것일까. 아니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일까. 결국 죽음에 이르고 나서야 뉴스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피해자가 이유 없는 것처럼 그 가해자도 특성이 없다. 그 이유 없는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늦기 전에 언제든 신호를 보내는 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고, 우리 안에 있는 혹시 모를 악에 대한 스스로의 통제가 필요할 것이다.
출처 :
http://www.bokjitime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927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524583
https://www.edaily.co.kr/news/read?newsId=03188166629084016&mediaCodeNo=257
https://www.sedaily.com/NewsVIew/1Z2NOXN58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