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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촉촉 Sep 13. 2021

보이지 않는다는 것

먼-데이 에세이 33. 시각장애인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들었다.
서울 서대문구부터 안양까지 꽤나 막히고, 길고, 힘든 운전이긴 했다.

하지만 나를 녹초로 만든 것은 40분 간의 암흑이었다.


내가 처음 시각장애인용 오디오북 녹음 봉사를 알게 된 것은 sc제일은행의 '착한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서였다. 일반인을 뽑아 오디오북을 녹음하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이었는데, 직장인 연극동호회에서 활동하던 때라 한참 발음, 발성에 관심이 많았었다. 그래서 봉사나 큰 의미 없이 내 목소리를 뽐내고 싶다는 생각에 지원했었다. 1차는 통과했지만, 2차 현장 오디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 이후 녹음 봉사에 관심이 생긴 나는 회사 근처에서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간 곳이 영광시각장애인점자도서관(이하 영광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이란 이름이 무색하게, 아현동 골목 안에 있는 조그만 공간이었다. 그때 회사 점심시간이 여유 있는 편이라 일주일에 한 번, 수요일 점심을 빼서 1시간씩 봉사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책을 제대로 "읽는" 일은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눈으로만 후루룩 훑는 것만 익숙했던 나에게 소리 내서 정확히 읽는 것은 낯설었다. 가뜩이나 처음 시작한 책이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책 '미스 함무라비'인 터라 여러 인물들을 연기하며 읽는 게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에세이 위주로 녹음했다.) 1시간을 녹음해도 발음이 틀렸거나, 다르게 읽은 부분을 확인해서 지우다 보면 채 20분 분량이 안 나왔다. 그래도 봉사를 한다는 뿌듯함과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도 있어서 재밌게 했다.


'불안이라는 위안' ; 두 번째 책을 끝내고 찍었던 기념사진


그러다 영광도서관이 아현동에서 홍제역 근처의 번듯한 건물로 이사를 했다. 물론 좋은 일이었지만, 점심시간을 활용해서 다녀오기엔 거리가 너무 멀어졌다. 그래서 나는 토요일 오전으로 봉사시간을 옮겨 녹음 봉사를 지속하게 되었다.

그러다 2020년, 코로나 사태가 발생했고, 도서관의 운영이 중지되었을 때, 나도 사정이 생겨 봉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저 추억으로 끝나는 가보다 했던 영광도서관에 지난주부터 다시 가게 되었다.


현장영상해설사 교육을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현장영상해설사'는 청각장애인의 수화 통역사처럼 시각장애인들에게 영상과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도서관 공지에 뜬 이 교육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예전 공연에서 만났던 시각장애인 관객 커플이 생각났다.

 당시 연극 동호회에선 대학로에서 무료공연을 진행했었는데, 누구의 지인도 아닌 시각장애인 커플이 들어왔다. 우리 진행팀은 모두 당황했다. 지인이 아니어도 공연을 보기 위해 오는 분들이 종종 있긴 했지만, 시각장애인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진행 팀에서 그분들에게 물어보니 영화는 오히려 보기 힘들지만, 소극장 연극은 발자국 소리라든가, 조명의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몇 번 보러 오신 적이 있다고 했다. 그분들에게 어떻게 안내를 해 드려야 하나 고민했으나, 그분들은 그저 앞자리만을 요청하셨다. 만약 그분들 옆에 현장영상해설사가 있다면 좀 더 우리의 연극을 잘 이해하셨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마침 개인 사정도 마무리되어 녹음 봉사를 다시 하고 싶던 마음이 들던 차라 더더욱 좋은 기회였다.


교육은 총 3개월 과정으로 발음, 발성 교육과 공연과 교육 현장에서 실습해보는 과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교육에서 만난 교육생들의 면면은 다양했다. 장애인 관련 단체에서 일하시는 분도 있었고, 문화 기획 관련 직업에 있던 분들이 있었고, 단순히 봉사에 관심 있어서 신청하신 분들도 있었다. 그리고 첫 강의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였다.

https://youtu.be/PQEfodbDODg

인상 깊었던 교육 영상

1교시는 여러 강의안과 영상자료를 통해 비장애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선입견과 오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특히 인상 깊었던 내용 세 가지.


1. 장애인식 개선 교육을 진행할 때 장애인들이 보통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만 도와주는 게 맞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은 도움을 요청해야 할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거나, 또는 특정 대상에게 도움 요청하기가 어려워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도움을 제안한다면 시각장애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2. 문을 열어주거나 요청한 물건을 가까이에 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문이 얼마나 열렸는지, 얼마나 가까운 곳에 뒀는지 알려주지 않아서 사고가 나는 경우도 많다. 차라리 정확하게 장애인의 손에 대주는 것이 좋다.


3. 시각장애인은 앞에서 살짝 이끌어주는 형태가 좋다. 뒤에서 민다거나 지팡이 잡고 끄는 행위는 장애인에게 매우 불안감을 준다. 대신 도와드릴까요 라는 말과 함께 의지할 수 있는 팔꿈치를 살짝 내밀어라.


그리고 2교시는 시각장애 체험 시간이었다. TV나 신문에서 시각장애인 체험을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한 적은 없었다. 2인 1조가 되어 한 사람은 시각장애인 역할로 40분간 그냥 눈을 가리고 움직이고, 그 짝꿍은 그 체험생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장애 체험을 하기로 했다. 시각장애인의 상징인 흰 지팡이를 짚고, 같은 조 교육생의 팔을 한쪽을 잡고 길을 나섰다. 사실 어느 정도 운동능력에 자신이 있고, 겁도 없는 편이라 오히려 너무 잘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다. 그런데 시작하자마자 실내에서부터 두려움을 느꼈다. 눈을 가리니 계속 뭔가 내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인지하지 못했던 의자나 책상, 휴지통 같은 것들이 발에 차였다.


밖에 나오니, 실내에서 느꼈던 답답함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아마 빛의 유무 정도는 느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짝꿍이 오른쪽, 왼쪽 친절하게 설명을 해줘도 뺑뺑 도는 느낌만 나지,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이 가볍게 통통 튕기던 흰 지팡이는 생각보다 무거웠고, 노란색 점자 블록을 느껴보려 했지만 무엇이 좀 다르다 정도만 느낄 뿐, 어떤 형태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또 눈 뜨고 돌아다닐 때는 장애가 되지 않던 아주 작은 굴곡과 턱들(아스팔트 땜빵이나 하수구 철망)도 나에겐 위협으로 느껴졌다. 30분 이리저리 흰 지팡이를 튕기다 보니 손목이 꽤나 아팠다. 그리고 소리도 깽깽 시끄러웠다.

반대로 내가 안내해야 되는 상황이 되자 이것도 꽤나 힘든 일이었다. 미리 전후 좌우를 살펴 안내해야 하는데, 자꾸 오른쪽 왼쪽을 잘못 말하곤 했다. 또 정확한 거리 감각이 없는 편인데, 앞의 장애물의 여부를 미리 설명하자니 스스로 망설임이 들었다. 다행히 내 짝꿍이었던 교육생은 지역주민이셔서 금방 방향의 감을 잡으시는 듯했다. 오히려 나에게 길을 알려주실 정도였다. 그러나 그분 역시 40분의 체험 후 교육장에 도착하자, 휴 하는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두에서 이야기했듯 그 체험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데 평소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물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교육이 나에게 준 스트레스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컸던 건 눈이 보이지 않았던 그 40분간 느꼈던 긴장이었다.


나의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를 처음으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계기였다. 나는 꽤 오래 녹음 봉사를 했었지만 그 수요자들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이 없었다. 그냥 내 목소리가 녹음되고 퍼뜨려진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물론 위의 체험은 일회성 경험이고, 시각장애인의 갖는 불편함은 내가 단순히 길에서 보낸 몇십 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주말의 그 보이지 않았던 경험이 내 남은 인생의 중요한 첫 발견일 것 같다.



출처 :

http://timesisa.com/news/view.html?section=9&category=16&no=11341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0005590&memberNo=32267445


http://www.ada.or.kr/


먼- 데이 에세이란?

'먼'데이마다 애'먼' 사람들에게 글을 뿌리는, '먼'가 할 말 많은 사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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