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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모사 Mar 21. 2022

슬프지 않았던 외할머니의 임종

외할머니는 2년 전 초가을에 장녀인 우리 엄마와 외손녀인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으셨다.

코로나 시국이었고 삼촌과 이모들은 외국에 있어서

부랴부랴 출국 후 2주간의 자가격리중에 임종 소식을 전화로 접해야했다. 그러한 연유로 마침 친정에 와있던

나와 엄마가 그날 아침부터 할머니가 숨을 거둘 때까지

옆에 있어드렸다.


외할머니는 내가 걷지도 못하는 아기였을 때 직장을 다니던 엄마를 대신해 나를 몇년간이나 키워주셨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 당시 외할머니가 외손녀 독박 육아

로 인해 감내해야만 하셨던 고생을 전혀 기억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외할머니는, 외할머니라는 단어에 담긴 푸근하고 자애로운 그런 정형화된 이미지와는 거리가

꽤 먼 분이었다. 고집 세고 까다롭고 말 한마디 상냥하

게 할 줄 모르는 옛날 분.


외할머니는 많은 또래 어르신들처럼 남존여비 사상을

자연스레 체득하고 자란 세대셨다. 그래서 딸이 낳은

외손주들보다 아들이 낳은 친손주들을 더 쳐주셨다.

그렇다고 대놓고 차별했냐 하면 그건 아니었지만

여하튼 미묘한 무언가가, 외손녀로서 감지할 수 있는

외할머니만의 편애가 분명 존재했다.


결정적으로 친손녀인 동갑내기 내 사촌의 결혼식엔

참석하셨던 분이 몇 년 후 외손녀인 내 결혼식때는

'노인네가 보기싫게 경사스런 자리에 나서는 거 아니다'

라는 납득 못할 핑계를 대시며 기어이 불참하셨다.


이러한 이유들로 나는 외할머니에 대한 애정, 손녀가 가

질 법한 뭉클하고 애틋한 그런 감정이 전혀 없었다.

외할머니의 임종도 그냥 어쩌다보니 그 타이밍에 내가

그곳에 있어서 지켜보게 된 것일 뿐. 오래도록 치매에

시달리시고 종국에는 운신도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한

90세 넘은 할머니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5남매 중 장녀로서 가장 많은 시간을 외할머니와 함께

했던 우리 엄마는 사무치도록 슬퍼하며 계속 외할머니

의 주름투성이 손을 잡고 끊임없이 속삭이셨었다.

"엄마,사랑해, 엄마가 내 엄마라서 정말 좋았어요."


그 순간 내가 했던 생각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어차피 돌아가실 외할머니,더이상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영면에 드시고, 남은 이들은 남은 이들대로 장례 절차 진행하고 손님들 맞이하고 발인하고 장지에 가고... 이런 복잡스러운 절차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에 그려지면서 어서 모든것이 끝나기를 바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와중에 말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부터 했다는 것이 소름끼치도록

불효 막심한 행태임엔 틀림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야말로 내 솔직한 심정이었는데. 일말의 죄책감

이 들었지만 얼마 안가 사라지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뒤늦게 도착한 친척들을 맞이했더랬다.


누구에게도 이 속내를 차마 발설하지 못하다가 얼마 전

우연히 신랑에게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레 고개가 숙여졌다. 나 완전 나쁜년이지? 그치?

그런데 신랑은 오히려 공감해줬다. 네 입장에서는 충분

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마음이 한결 편해지며 아이러니하게도 그제서야,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조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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