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시 기억산책 프로젝트 3주차
처음, 고잔동에 간 날을 기억한다.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 한동안 가만히 앉아 픙경을 바라보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에서의 삶.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고잔동에서 그런 삶을 나무라기라도 하는 듯 해리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오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 고잔동은 마치 소설 속 나오는 다른 세상 같았다.
오래된 연립단지 때문일까, 내가 살고 있는 신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커다란 나무들의 웅장한 모습 때문일까. 대부분의 건물이 낮아 고개만 들어도 환하게 펼쳐지는 하늘 때문일까.
지난 2주간 필로스토리는 주민들의 참여로 진행되는 ‘스토리워크숍’을 진행했다. 필로스토리에서는 직접 개발한 스토리툴킷을 통해 3단계로 이야기를 만드는데 오늘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1주차에는 주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고잔동’의 이야기 자산을 수집했다. 우리 이야기 개발 플로우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모든 이야기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야 개개인이 모든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개인의 이야기가 녹아 들어가야 참여하는 모두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개인의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는데 몰두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 사실 많은 이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타인에게 꺼내놓을 만큼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30년 동안 구두만 만들어 온 장인조차 그렇다. 우리는 스스로의 삶과 경험을 돌아보며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이런 이야기는 너무 사소하지 않나요?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작고, 사소한 것에서부터다. 그 작고 사소한 시작이 없다면 훗날 정말 멋지고 좋은 이야기의 탄생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하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프리히드 니체
일단 시작해야 한다. 다음으로 넘어가는 방법은 시작하는 것 뿐이다. 사소하고 작은 것부터, 욕심내지 않고 단계별로 나아가면 된다.
이야기 자산을 찾기위한 스토리툴킷
: 콜렉트북/ QnA Ticket / 이터널져니 맵
2주차에는 수집한 이야기 자산을 큐레이션하고 에디팅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우리의 시선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이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이다.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에서 주체성이 부여되고, 결국 내 삶의 이야기를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내 시선으로 재편집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는 곧 주체적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고잔동 마을 주민들을 3개로 나누고, 각각의 조가 생각하는 고잔동의 마을 키워드 10가지씩 뽑게 했다.
고잔동, 했는데
이 키워드 빠지면 좀 섭하지?
우리는 모든 과정을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게 쉬운 질문과 언어로 다시 번역하는 일을 진행했다.
이야기 자산을 큐레이션 하기 위해 사용한 스토리툴킷
: 키워드 카드
그리고 마지막 3주차. 드디어 우리 모두 아티스트가 되는 날이다. 예술은 멀리 있지 않다.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예술이다(라고 나의 파트너 해리는 매일 말한다. 한예종 예술경영 출신....ㅎㅎ) 마지막 날에는 우리 모두 ‘매니페스토’를 쓰는 작업을 한다.
매니페스토는 말 그대로 ‘선언문’이다. 보통 선언문이라고 하면 국가에서 정치적인 의미로 사용되거나 브랜드에서 자신들의 철학을 이야기할 때 사용된다. 하지만 필로스토리에서는 이 선언문을 ‘개인의 맥락’에서 사용하는 작업을 계속 한다.
내가 나 스스로를 정의내리겠다는 선언이자
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오늘 개인의 맥락에서 매니페스토를 작성하는 것 뿐만 아니라 고잔동이라는 마을의 맥락에서 작성하는 매니페스토. 두 가지 작업을 진행한다. 매니페스토 작업은 자칫 쉬워보이지만 굉장히 어렵다. 내가 나에게 대해서 말하는 것이 가장 쉬워 보이지만 가장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거 너무 어려워,
우리는 이런 수업을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마을의 해설사 한 분이 너스레를 떨며 말씀하신다. 그저 앉아서 정답만을 배우고 외우는 수업. 아마도 평생 그런 수업만 들어오셨을 거다. 잠시 딴짓을 해도 사실 다른 생각을 해도, 수업을 진행하는데 별 영향을 주지 않는 수업.
그에 반해, 필로스토리의 워크숍은 앉아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수업이 진행되고 나아간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정답이 없다. 삶에 정답이 없듯이 틀린 이야기는 없다. 단지 서로 다른 이야기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이렇게 주입식 교육만 받던 분들은 처음에 어떤 멋진 정답을 자신이 맞춰야하는 것처럼 군다. 그래서 아주아주,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금세 이 수업을 이해하고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삶을 말씀해주신다. 아주 신이나서, 재미있게!
자, 마지막 시간인 만큼 우리가 선물을 준비했다. 지난 시간동안 우리가 함께한 작업은 무엇인지, 그 작업은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가 직접 생각해내고 뽑아낸 단어와 이야기들이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 필로스토리의 시선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더 멋져보이고 싶거나’ 혹은 ‘더 있어보이고 싶거나’ 내 안에 없는 것을 쓰려고 하기 때문이다.
위대학 작가들의 등단 첫 작품은 대부분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자전적 소설’이다. 그래서 문학계에서는 첫 작품 후에 어떤 작품을 내놓는지가 진짜 작가로 살아가는가 아닌가를 결정 짓는다고 한다. 그만큼 타인의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우리는 가장 쓰기 쉽고, 내 안에 이미 가지고 있는 이야기 자산을 찾아내야 한다. 타인의 시선이나 언어가 아닌 내 안에서 솟아나온 것. 진정성 있는 이야기는 그렇게 탄생한다.
안산시 기억산책 프로젝트 3주차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