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리 Mar 08. 2023

인생은 output이 아닌 input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 떠나야 보이는 것들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리며 며칠간 폭우가 이어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인 일요일 늦은 오후.


​필터를 사용한다 한들 이 빛깔을 온전히 담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은은하게 햇살을 머금은 하늘과 나무, 사람들과 건물들 모습을 마주한다.


주말 SCBD Pacific place mall 앞 차없는 거리

차 없는 거리로 바뀐 휴일, 자카르타 SCBD 퍼시픽 플레이스 몰 앞에는 인라인 스케이트 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저마다 알록달록한 헬멧을 쓰고 바람을 가르며 스케이트를 굴린다.


​아무 생각 없이 걸어도 좋지만 가끔 잠시 멈춰 아름다운 풍경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이런 행복한 순간들을 사진으로 담아두면 찾아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좋은 순간을 저장해 두어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행복을 만드는 것.


똑같은 시간도 무엇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담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즐거울 수도 있고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지난 2년여간 이곳 외국에 나와 살고 있다는 점이 감사함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꿈꾸고 동경하는 ‘해외에서 한 달 살기’를 나는 한 달도 아닌 몇 년간 여행하듯 살고 있으니 값진 시간으로 여겨졌다.


늘 모국어가 들리고 모국어로 말하는 똑같은 환경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나날들에 어느새 호기심과 설렘은 사라지고 일상이 무기력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외국에서 사는 일은 새로울 것 없는 일상에 변화를 주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인생의 선물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아침마다 아이 등굣길에 함께 따라나서며 하루를 시작하는 인사 ‘슬라맛 빠기’, 차창 밖 끝없이 이어진 오토바이 행렬, 길가에 무수히 늘어선 삐죽 솟은 붉은 코스투스 식물들, 거리를 오가는 히잡을 쓴 여인네들. 인도네시아에 오지 않았다면 미처 모르고 살았을 언어와 풍경들이다. 그러나 외국생활도 일상이 되면 여기가 한국인지 인도네시아인지 모르고 살아지기도 한다. 그러다 퍼뜩, 마냥 언제까지나 여기 있을 수 없는 정해진 주재기간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다시금 이국에서의 삶을 여행 온 것처럼 반짝이는 시선과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냥저냥 흘러 보내는 하루하루가 아쉽고 아깝다.



몇 달 전, 인도네시아의 대표색이 청록색이라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된 이후, 비로소 ‘스나얀 플라자 몰’과 발리에서 온 빵집 ‘무슈 스푼(Monsieur Spoon)’의 청록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리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청록색을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가 생겼다. 이전부터 거기 그 자리에 늘 존재하던 ‘청록색’이 ‘나 여기 있었어’하며 손짓하는 것 같았다. 의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했을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내가 알게 되고 의식하게 된 만큼 눈으로 담는 폭도 넓어지고 마음에 담기는 깊이도 커졌다. 그리고 현재 나의 삶의 터전인 ‘인도네시아’라는 나라가 한층 더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정들면 고향’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미 이곳과 정이 담뿍 든 것 같다.


인도네시아의 대표색 '청록색'


​인생은 결과물을 보여주는 output이 아닌, 과정을 보여주는 input이라고 생각한다. 삶에서 지나온 여정과 그 길에서 마주한 것들, 마음에 담고 느꼈던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여나가는 과정이다. 우린 살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고 알아간다.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란 것은 없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좀체 알 수 없던 인생의 힘든 시간들조차 결국 자양분이 되어 자기 안에 남는 것이다. 새로운 잎이 나고 꽃이 피는 봄도 겨울이 오면 결국 전부 시들고 만다고 회의감에 빠질 수 있지만 사실은 그런 겨울이 있기 때문에 땅으로 떨어진 오래된 잎이 영양분이 되어 땅은 점점 더 좋은 토양이 되고 새로운 잎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벌레라 해도 모두 무언가의 영양분이 된다.



얼마 전 일본어 문장을 번역하면서 가슴에 와닿은 구절이 있다.



“오늘 수족관에 와서 새삼 든 생각인데,
우리는 헤엄치는 물고기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물고기가 움직이면서 생긴
물결을 보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사는 동안 알 수 있는 건,
우리가 만난 사람들이 일으킨 물의 일렁임,
그 물결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작은 파장이 우리 가슴에 남는 거야.”

<사운드라이브러리, 세상에 하나뿐인 책 中에서>


삶도 여행과 같다고 한다. 목적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가는 길이 중요하다.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어떤 목표만을 향해 가는 것보다 조금 에둘러 가더라도 지나가는 길에 눈에 담고 느낀 것들이 우리 안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라마단(Ramadan), 한 달간의 이슬람 금식기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