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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석천 Feb 01. 2017

보홀, 난파선과의 운명적인 만남

다이빙과 여행으로 세부 CEBU 한 바퀴 (1)

원래 첫 목적지는 보홀이 아니었다. 예전에 이미 1주일 정도 여행하며 머물렀던 곳이기에 보홀은 이번 다이빙+여행의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


그런데 운명이라는게 있긴 있는 걸까.

한달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쳐두었건만, 첫 목적지였던 '말라파스쿠아 Malapascua'에 심한 태풍이 오는 바람에 필리핀으로의 출발을 겨우 하루 앞두고 모든 예약들이 캔슬되었다.


연말 성수기. 하루만에 목적지를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부 근방 대부분의 다이빙샵들이 예약이 꽉꽉 들어차 있었고, 리조트나 호텔 가격은 내 통장 사정따윈 모른다는듯 천정부지로 비쌌다.

그렇다고 이 귀한 휴가의 며칠을 그냥 싸구려 숙소에서 태풍이 지나가주길 기다리며 보낼 순 없었다.


그래서, 보홀로 가게 되었다.


보홀 Bohol 에는 필리핀 전 지역 중 가장 많은 한국인 다이빙샵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덕분에 성수기 시즌이더라도 자리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태풍의 영향도 피해갈 수 있는, 이 상황에선 최고의 해답같은 곳이었다.

- 세부 근방 주요 다이빙 포인트 지도 ⓒ제석천 -
뾰족한 섬 끝에 위치한 말라파스쿠아가 태풍을 직격탄으로 맞을 때에도 두개의 섬 사이에 오롯이 싸여있는 보홀 바다는 잔잔하기 그지 없다.
더욱이 대부분의 다이빙샵이 위치한 아로나비치 Alona beach 는 바다를 삼면으로 끼고 있어 앞바다에 바람이 거셀 땐 뒷바다에서 놀면 그만이니, 태풍의 영향을 피하기엔 최적의 장소가 아니겠는가!


필리핀 현지인들에게도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인지라 막탄 공항에서 보홀로 넘어갈 교통편이 다소 걱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홀로 갈 운명이긴 운명이었는지, 이전에 보홀에서 만났던 강사님이 이 얕은 인연을 내치지 않으시고 본인 샵에 자리를 마련해주셨고, 오션젯 페리와 현지 교통편까지 모두 알아봐주신 덕분에 무사히- 마음 편히- 보홀 아로나비치에 도착할 수 있었다.

Alona beach, Bohol, Philippines ⓒ제석천

아로나 비치에 도착하자, 태풍 때문에 발을 동동거렸던 우리를 비웃듯이 커다란 무지개가 하늘에 척- 걸렸다. 무지개가 우리에게 목적지 하나는 제대로 골랐다고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지개 신호 덕분인지, 보홀의 날씨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만큼 좋았다.

Alona beach, Bohol, Philippines ⓒ제석천

필리핀의 특징인 높디 높은 구름과 에메랄드빛 바다, 눈부신 석양이 만나 아무데나 프레임을 갖다대도 그림이었다. 휴가 온 가족들은 백사장에 파라솔을 펼치고 앉아 바다를 즐겼고, 서양인 커플들은 모래 위에 누워 태양을 만끽했다.


평화로운 풍경에 딱 알맞게
바다도 잔잔했다.
전갱이 떼, Jack fish Schooling / Balicasag, Bohol, Philippines ⓒ Just Dive in Bohol
거북이들, Turtles / Black forest in Balicasag, Philippines ⓒ Just Dive in Bohol

수많은 다이버들을 보홀로 이끄는 발리카삭 Balicasag Island 은 여전했다. 수백마리의 잭피쉬 Jack fish (Big eye Trevally, 줄전갱이) 들의 군무 schooling 도 여전했고, 사막 같은 블랙 포레스트 Black forest에 모여 해초를 뜯는 수십마리의 거북이들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실, 내가 보홀의 '시그니처'라고 생각하는 건 잭피쉬떼나 바라쿠다떼가 아니라 수심 5m 근처에서만 볼 수 있는 마치 어항 속처럼 아름다운 뷰 였는데, 그 역시도 여전했다.

수심 5m 뿔산호 군락과 열대어들이 만들어내는 그림같은 뷰 / Stage horn corals & Damsel fishes ⓒ Just Dive in Bohol

그러나 태풍으로 가장한 운명의 여신이 나를 보홀로 이끈 것은...


아마도 이 난파선 때문에


아로나비치 앞바다, 수심 35m 즈음에 가라앉아있는 작은 고깃배. 칼리파얀 뉴 렉 Kalipayan New wreck 이라 이름붙여진 바로 이 난파선.

전세계 다이버들을 애태우는 유명 난파선들에 비하면 '코딱지만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크기. 아마 이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지 않았다면 이름따위 붙여질리 없을 자그만 고깃배.


그러나 -많은 다이빙 포인트에서 그러하듯, 다이버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일부러 가라앉힌 것이 아니라- 태풍이 거세던 어느날 밤 자연적으로 생겨난 난파선이라 꽤 의미 있는 곳이라 한다.


그와는 별개로, 나에게는, 내 인생 첫 난파선이기에 의미가 큰 곳이었다.


뱃머리 수심 35m. 고물 수심 약 40m.  '코딱지만한' 난파선이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깊이는 아니다. (체험다이빙은 물론 오픈워터 라이센스 소지자도 내려올 수 없는 깊이.. 라고 멋지게 포장해본다.)


한참동안 하얀 모래사장같은 바닥을 헤치며 유영하다보면, 저 멀리서 난파선이 자태를 드러낸다. 난파선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퀀스는 마치 해양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만 같아서 호흡기 너머로 말을 건넬 수만 있다면, 내 다이빙 버디에게, 내 눈 앞에 있는 이 풍경이 진짜가 맞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혹시 누가 내 머릿속에 영화 필름을 걸어놓은 것은 아니냐고.

다 삭아버린 피부, 바다와 한몸이 되어가는 그 형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신비롭고 환상적인 광경이지만, 칼리파얀 뉴 렉을 더 몽환적으로 만드는 것은 수많은 물고기떼들이다.


한낮의 거센 태양이 이 깊은 곳까지 빛을 비추고 있건만, 수백 수천마리의 다양한 물고기들이 난파선을 보호막 삼아 깊은 잠에 빠져있다. 다이버들이 옆에서 시끄럽게 공기방울을 뿜어대는대도 마치 정지 화면을 틀어놓은 것마냥 미동도 없이 난파선 안팎을 에워싸고서.

Kalipayan New wreck, Alona beach, Bohol ⓒ제석천
예상치 못한 흥분으로 가득차 카메라가 미친듯이 돌아가고 영상이 매우 조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파선은 멋지다.


눈 앞에서 다큐멘터리와 3D 정지화면이 동시에 펼쳐지니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던 것 같다. 안 그래도 깊이 내려와 있어 공기 소모량이 큰데, 와~ 햐~ 캬~ 감탄하느라 공기가 모자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만약 운명의 여신이 정말 계시다면,


여신이시여- 말라파스쿠아에 태풍을 보내주셔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난파선 근처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올라왔지만, 아쉬움을 다 털어버리지 못했다. 바다에서 출수하고도 몽환적인 그 기분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우린 그날 밤, 다시 난파선을 찾았다.

야간 다이빙으로 40m 수심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흔한 일도 아니고 그다지 안전한 선택도 아니었지만, 어두운 바닷속에서 우릴 맞이한 칼리파얀 뉴 렉은 역시 우릴 실망시키지 않았다.

나는 겨우 다이빙을 한지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 다이빙 인생에서- 아니, 내 전체 인생에서 그때만큼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은 거의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한밤의 난파선은 미치도록 아름다웠지만, 그 대신 '기록'을 허하지 않았다. 궁극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 속에만 소중히 간직하라는 계시일까.


그 밤의 이미지를, 그럭저럭 비슷하게 표현한, 구글에서 데려온 사진 한장으로 대신한다.

Kalipayan New wreck, Alona beach, Bohol ⓒ Sea Explorers Philippines

깊고 어두운 바닷 속, 가닥 가닥 나뉜 푸른 랜턴 빛줄기 아래 겨우 겨우 모습을 드러내는 난파선은, 그 어떤 다큐멘터리의 한장면보다 아름다웠다. 이 글로만 칼리파얀 뉴 렉을 만나볼 수 분들께는 미안하게도, 저 사진에 비할 수 없이 환상적이었다.


이 보잘것없는 난파선이 이렇게도 환상적이었던 것은 물론,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삶에도 다큐멘터리보다 아름다운 순간이 곧 찾아오리라고, 빌어주고 싶다.



(계속되는 '보홀' 이야기)

https://brunch.co.kr/@jesuckchun/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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