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7.10-19, 태국 매홍손주 빠이
40리터 배낭 하나면 인생의 모든 필요가 충족된다고 믿는 자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태양이 한층 가까이 내려와 지표면을 달구는 시간 도로는 한산해지고, 선풍기가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작은 음식점은 맥주 한 병만을 시켜놓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손님이 늘어간다.
스쿠터 타는 법을 이제 막 배운 어설픈 초보 운전자들은 팔, 다리, 혹은 얼굴을 아스팔트 바닥에 갈아 커다란 붕대를 칭칭 감고도 신나는 표정으로 다시 스쿠터 위에 오른다. 눈꼽이 꼬질꼬질하게 붙어있는 개들은 술집이나 카페 안의 시원한 타일 바닥 위에 척척 누워 오가는 사람들을 곁눈질한다.
밤이 되면 현지인들은 더운 낮동안 손질한 식재료를 카트에 담아서 길거리로 나온다. 아기를 업고 나온 젊은 엄마는 타코야끼를 팔고,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성은 자른 옥수수를 버터와 설탕에 버무려 컵에 담아 판다. 망고, 드래곤후루츠, 파파야 같은 과일들도 길다랗게 깎여 플라스틱 컵에 담겨 주인을 찾는다.
와이낫, 지코, 에디블재즈 같은 인기많은 술집들에서는 레게와 힙합 그리고 재즈 음악이 흘러나온다.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한 이들은 세븐일레븐에서 맥주 캔을 사서 길거리에 앉아 담소를 나눈다. 얇디얇은 밀가루 반죽 위에 바나나를 얹어 굽고 누텔라를 바른, 바나나 누텔라 로띠 한 그릇을 안주삼아 인생을 논한다.
네가 그렇게 오고 싶어하던 이곳 태국 빠이에서 나는 너를 생각했다. 서울의 어느 작은 포장마차 안에서 눈을 반짝이며, 히피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한번쯤 길게 살아보고 싶다고 이야기하던 너를 생각했다. 네가 여기에 왔다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너라면 여기에서의 모든 시간을 꽉 채워내며 살아있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흡수할 수 있었을까.
나는 너와 같지 않아서, 훨씬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빠이라는 곳을 알아가고 있다. 한국을 버리고 이곳에 정착해 구름처럼 오가는 사람들에게 잠시 머물 쉼터를 제공해주는 한 스님의 집에서 머물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다만 잠시 이 땅 위를 스쳐갈 뿐이라며, 본인 역시 임시로 이 집에 다녀가는 것이니 편히 생각하라는 스님의 집에서 마음을 풀어놓았다. 마당에 매달린 해먹 위에 누워 옆집의 태국인 아주머니가 준 망고를 깎아 먹기도 했다.
서울에서의 8년이라는 시간이 천천히 얼려버린 온몸의 감각은 빠이에서 조금씩 균열하며 녹아내리고 있다. 어제는 숙소 옆방에 짐을 푼, 스물 두 살짜리 남자 대학생의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굽은 도로를 달려보기도 했다. 보호장구라고는 헬멧 하나뿐이었기에 처음에는 내리막이 나올 때마다 속도를 낮춰달라는 의미에서 어깨를 두 손으로 꽉 쥐었지만, 이내 사고 여부는 나의 걱정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람이 헬멧을 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는 와중에도 도로 아래 깊은 협곡과 산등성이에 걸쳐 펼쳐진 숲의 깊이가 나를 사로잡았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나무와 풀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가능성을 펼쳐보이며 뻗어나가던지, 그 아름다움에 눈물이 조금 나기도 했다. 그 길의 끝에는 물빛이 유리알처럼 투명한 천연 온천이 있었고, 그 안에서 차가운 비를 맞는 가운데 몸을 녹이며 나는 우리의 젊음은 왜 그렇게 굳어있어야만 했는지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