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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Sep 03. 2017

당신을 걷다

0. 프롤로그 - '보는 법'을 배우다


프랑스 남부 루르마랭(Lourmarin)에 위치한 알베르 카뮈의 집. 여전히 그 자리에 살고 있던 카뮈 딸의 가족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파리 페르라쉐즈 묘지에 있던 마르셀 푸르스트의 묘지. 관광객이 가득했던 짐 모리슨, 에디트 피아프의 묘지와 달리 별로 찾는 이가 없어 흙먼지만 쌓여있었다.


사랑은 호기심으로 시작된다. 그 사람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어떤 색깔의 옷을 즐겨 입을까. 그가 좋아하는 산책로에는 어떤 나무들이 심겨져 있을까, 방에는 어떤 책이 꽂혀 있을까... 이유없이 그런 사소한 것들이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다.

4년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금 통장 하나를 들고 떠나온 6개월 짜리 배낭여행. 밥벌이의 괴로움 속에서 세상에 대한 모든 호기심을 잃어버렸던 나는 초반 여행의 목적을 잃고 방황했다. 정규직 직장을 포기하고 퇴직금 탕진이라는 큰 대가까지 치르고 여행에 나섰지만 보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대로 세상을 읽어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책 한권 배낭에 담지 않았던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보는 법을 몰랐던 나의 눈에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은 윈도우 배경화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행을 다니며 '내가 뭘 좋아하는 지 모르겠어요'라고 고백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나는 오히려 내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내 안에 '나'라는 것이 있을까. 그냥 세상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며 살아온 것만 같았다. 꿈꾸던 모든 것들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나는 기대보다 훨씬 재미없어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돌아다니다가도,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의 이야기가 얽힌 도시에만 가면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던 시골 촌동네의 여고생으로 돌아갔다. 새벽에 기숙사 사감 몰래 독서실에 앉아 그들의 문장과 이야기를 읽어내려가며 느낀 설렘을 되찾았다. 작가들의 피사체가 되어 작품으로 재탄생한 도시와 건물과 사람들 앞에서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그가 걷던 거리 위에 서서 그가 바라보았던 건물들을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뻑뻑해졌고 가끔은 감동해서 눈물이 나기도 했다. 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세계의 단면, 그리고 그것을 문장으로 적어내려갔을 그 고독한 시간들이 부러워 질투에 휩싸였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사랑했을, 리스본의 골목과 그 위를 달리는 빨간 트램.
리스본 코메르시우 광장에서 바라본 테주 강변의 풍경. 한 커플이 산책을 하고 있었다.


나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해보고 싶었지만 정작 '보는 법'을 알지 못했던 나는, 그렇게 작가들과 함께 여행하며 조금씩 보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올라와 세상을 배워가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던 젊은이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는 파리를 거닐었고 로댕의 작품을 함께 감상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정착을 꿈꾸다 교통사고라는 부조리한 방식으로 세상을 떠난 알베르 카뮈와는 남프랑스의 루르마랭을 산책하며 삶의 조건을 이야기했다. 오르한 파묵은 평생을 산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를 자랑스럽게 구석구석 소개해주는 친절한 할아버지 가이드가 되어 주었고 '순수 박물관'이라는 환상적인 공간에 나를 초대해주었다. 페르난두 페소아와는 그가 사랑했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고 그가 예찬했던 리스본의 작은 방을 함께 구경했다.


문장으로만 접했던 그들이 사랑하는 풍경 안에서 나는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을 비교하면서, 무엇이 그리 달라졌는지 찾다보니 내 눈에만 들어오는 것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의 도시였던 특별한 도시들은 점차 나의 도시가 되어갔다. 나만의 이야기를 적어내려갈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여행의 2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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