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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지나 하루 달

시&에세이

by 여상

[ 보름 지나 하루 달 ]

보름밤이 되고 하루가 지나면
산 아래 맑은 물
천천히 흐르는 곳에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대 실개울에 띄운

고운 달빛

하루 지나
마을 앞 물가에
도착할 테죠?


ㆍㆍㆍ


오늘 젖은 달빛에

어제 보내신 달빛

보태었으니

그리움은 두 배가 되었나요
아니면
보고픈 가슴앓이, 그대

물 위에 쓰신

위로의 말로

달래어졌을까요

그리움이란

하루 넘어 지나서야
깨달아지는 것
보름달 뜨고 하루

그리고 하루 더 지나면

가슴 터지고 싶은 산벚마냥
나는 또 기다리렵니다

. . .

다시 달차고

하루가 지나면
이곳에 나와 있겠어요
하루 넘어 지나서야
진달래 분홍 사무치게
그리워지니까요




흔히들 보름달 보다 하루 지난 다음날의 달이 더 크고 밝다고 말한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느껴지는 마음의 이유는 있을 법도 한데, 아마도 정보름 달밤을 깜박 놓친 아쉬운 마음이 다음날 밤에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보름이 하루 지난 밤, 왠지 내 눈에도 달님이 더 크고 동그랗게 보인다.


동그랗고 이뻐라! 온 세상 밤을 밝히는 달님이여! 대지에도, 흐르는 모든 개울과 강과 바다에도 차별 없이 골고루 달빛을 나누어 주고 있으니, 주어도 주어도 모자람 없이 세상은 황금색으로 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어제 상류 샘이 머금은 달빛은 하루를 지나 지금은 여기에 흐르고 있을 테지? 어린애처럼 들떠 동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오늘 달빛이 담뿍 보태어지겠구나. 그렇게 보태어진 금빛 물결이 흐르고, 보태어지고 또 흘러 황금의 바다를 이루겠네. 온 세상이 달빛에 물들겠구나! 어린아이가 되어 마냥 꿈을 꾼다.


fr. PixaBay


달밤에 사랑의 은유가 빠질 수 없다. 그래서 예로부터 은밀하고 아름다운 밀애는 초승달이 주로 맡아하고, 보름달은 그리운 마음을 대변해 왔었나 보다.

달 밝아라 밝아라
내 마음도 밝아라
임 계신 곳으로
달빛 흐르고
그리운 님 모습 되어
내게 비추어라.
- 전래시, 작자 미상 -

옛 시인의 마음이 이토록 진솔하고 고와, 나도 흉내 내어 시를 지어 보았다.




어려서는 남산자락의 달동네에서 자랐다. 발아래로는 도시의 불빛이 별들처럼 빛났고, 밤하늘에는 둥그렇게 달이 떴었다. 달빛이 훤한 날엔 어머니들은 아버지들 술상을 봐 드리고는 한 마루에 모여 앉아 나물 같은 소일거리를 하며 떠들썩 이야기꽃을 피우셨고, 덕분에 우리 개구쟁이들은 저녁밥을 먹고도 좀 더 뛰어놀 수 있었다. 막걸리 심부름은 우리 차지였는데, 몇 차례 다녀오면 과자도 서너 봉지 얻을 수 있었으니 달밤이 얼마나 좋았겠는가.


성인이 되어 도시에 살면서 달빛을 잊어버렸다. 보름이 되면 빌딩 숲 위로도 둥근달은 어김없이 떠올랐을 텐데, 땅에도 시선을 앗아가는 볼거리들이 많았지만, 그보다도 매일 무엇엔가 쫓겨서 하늘 쳐다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거칠기만 한 하루의 삶을 헤쳐 나가느라 고개가 무거워진 탓도 있었다. 어쩌다 연수를 가거나 휴가를 얻어 도시를 벗어나면 가끔 달님을 만나기도 했다. 야심한 밤 유원지 마당 구석에서 남몰래 방뇨를 하다가 만난 달님은 필시 고단한 술에 젖어 있었을 테지.




지금쯤이면 저 노고단 산 위에서 달빛 여신 마고님이 봄바람을 준비하고 계시겠구나. 찬바람을 이겨낸 겨울초들이 어깨를 들썩대고, 혹한을 견디느라 오그라진 포도나무 가지에도 느껴질 듯 말 듯 희미한 생명빛이 감돈다. 며칠 지나 쌀알만 한 야생초가 신호를 보내면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를 따라서 정신없이 꽃잔치가 열리겠네. 강기슭에는 알을 깬 치어들이 몰려다니고, 숨어 있던 다슬기도 모두 나와 기지개를 켜리라. 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린 봄이었던가! 교교한 달밤에 나 홀로 과잉감정이다.


아, 달빛이 아름답다! 누군들 마음에 달빛 머금은 그리움이 없겠는가. 이제야 고개를 들어 가만히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보고픈 얼굴들이 달그림자에 앉았다 사라지고... 그리움의 크기만큼 한 발자욱씩 새봄은 다가오시는데, 보름하고 하루 지난 달빛이 오늘 밤 강물에 가득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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