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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詩

시&에세이

by 여상

[ 빈 詩 ]


시를 지어 보려고

머리를 싸매다가

방안을 서성이다가
산책을 나섰다가


쪼그리고 앉아, 흐르는 개울물

바라보다가

언덕배기 넘어가는

노을 보다가

애꿎은 돌 몇 개

툭 툭 차다가
까마귀 몇 마리

둥지로 날아가길래


그냥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지, 뭐


겨울 산책길이 고즈넉하다.




오늘도 감흥이 돋아 시를 하나 지어보려고 책상을 끌어안고 앉았다. 향기가 좋은 에티오피아산 커피 한 잔을 옆에 두고 연필을 굴리며 제법 폼을 잡아 봤지만, 감흥과는 달리 단어들이 뒤섞이고, 글자들이 꼬이기만 했다. 연필 끝을 물고 머리를 긁으며 서성대 보아도 딱히 잡히는 것 없었다.


갑갑한 마음도 달래고, 글 재료도 얻을 겸 방문을 열고 산책을 나섰다.

한겨울이지만 오늘은 햇살이 좋고 오랜만에 날씨가 포근하여 산책 나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물가의 산책로를 걸으니 반겨주는 것들이 많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친구들이 보내온 눈짓들을 호주머니에 하나씩 담아본다.


따스한 햇살 한 줌,

차갑고 상쾌한 바람 한 줄기,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부르는 새의 노래 한 소절,

얼음 낀 강돌의 침묵도 찔러 넣고,

졸졸 흐르는 냇물의 청량한 목소리,

홀로 서 있는 소나무의 고독까지 주워 넣다 보니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뿌듯한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봤지만 딱히 시상(詩想)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럼 뭐 어떤가. 억지를 부린다고 일이 되는 것은 아니잖는가. 오히려 내 머릿속에서 단어들이 다투지 않도록 내버려 두고는, 신선한 저녁 공기를 마시며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왔다. 돌멩이도 툭툭 차면서...


법정스님은 [무소유]에서 "사람이 억지로 꾸미려 들 때부터 그 삶은 꼬이기 시작한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지금 내게 스님의 지혜가 필요한 시간인 것 같아 마음을 편안히 놓고 다시 책상에 앉았다.


오늘 나의 詩는 '빈 詩'이다.


fr. PixaBay


#시 #글쓰기 #산책 #자연 #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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