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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길성 Jul 28. 2024

손주들이 한국 여행에서 남긴 것들

누구나 싸우면서 배우고 살아가기도 한다

    스웨덴 사는 손주들이 놀러 왔다. 10살 이안이와 7살 이나가 여름 방학이 되어 한국을 찾은 것이다. 아이들은 일 년 동안이나 한국 여행을 간절히 기다려왔다. 한국은 엄마 아빠 모국이지만 낯선 곳이다. 친구도 없고 가족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에게 한국은 이국 땅이니 여행이 그토록 설렌 지도 모른다. 그런 여행도 이제 이틀이면 끝이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나간 것이다. 입국할 때 반가웠던 얼굴이 헤어질 날을 앞두고 슬픈 표정으로 변하며 긴장이 감돌기 시작한다.


     지난번 헤어질 때 이안이 모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헤어지는 게 싫어 한참 동안을 흐느껴 울던 기억 때문이다. 얼마나 서글퍼하던지 감히 달랠 수가 없었다.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손자는 어릴 적부터 인정이 많았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아이였다. 착한 심성에 공감 능력이 더하니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하는 것이다. 이별의 슬픔을 견디기 힘들어하니 걱정이다. 지난 이별 장면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지만 은근히 걱정이 된다. 헤어지는 건 아쉽지만 밝게 웃으면서 헤어지고 싶다. 


     하지만 또 다른 복병이 등장할 것만 같다. 동생 이나다. 어젯밤 할머니한테 스웨덴에 가기 싫다고 실토하더라는 것이다. 더 놀고 싶은데 여행이 너무 짧다고 투정도 부렸다는 것이다. 지난번 헤어질 때 조용하던 녀석이 의외의 고백을 들으니 걱정이다. 한글이 어려워 표현에 서툰 손녀가 속 마음을 똑 부러지게  밝혔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마음 편히 떠나 생각은 접고 심란한 이별을 대비해야 할 것 같다. 손녀는 사교성이 좋아 스웨덴에 친구도 많은 녀석이다. 그런 아이가 여의치 않은 구석이 뭔지 우선 우려된다.


     그렇다고 한국 여행이 신이 날 것도 없다. 또래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 체험이 뭐 그리 재밌겠는가. 한국에 있는 박물관이나 유적지 탐방이 아이들이 무슨 흥미를 느끼겠는가. 부모 욕심에 지나지 않는 투어 코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아이들 여행은 새로움이 주는 신기함이 전부다. 설렘이 즐거운 추억의 일부로 어렴풋이 남을 뿐이다. 학교 앞 문구야 놀자에서 달고나나 포켓 몬스터를 뽑는 게 여행하는 맛이고 재미다. 할아버지가 몰래 사준 달콤한 사탕과 아이스크림을 실컷 먹을 기회가 아이들에게 신나는 여행이다.


      스웨덴에서는 누릴 수 없는 자유가 여행의 자랑이고 추억이 될 수 있다. 어떤 구박이나 잔소리에서 해방되어 먹고 싶은 걸 먹어보고 하고 싶은 걸 해보는 게 아이들이 원하는 자유다. 그래서 오자마자 탕후루를 외쳐댔던 것이다. 오자마자부터 무인 자동 판매부터 가고 싶어 했던 것이다. 할머니가 그리워 돈가스가 먹고 싶다고 하고, 할아버지를 좋아해 달걀과 오이로 만든 김밥이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아이가 가장 하고 싶은 건 미디어 세계에 빠져보는 것일 것이다.


     아이들 세계는 미디어 전쟁놀이와 가장 가깝다. TV가 아니면 게임기를 끼고 지내야 직성이 풀린다. 미디어가 아이들을 포획하여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빠와 동생이 싸우는 것도 미디어를 놓고 싸운다. 이용 시간과 순서를 놓고 서로 싸우는 편이다. 중독자들이 벌이는 미디어 경쟁에는 양보도 없다. 실랑이가 벌어지면 곱게 끝나지 않는다. 대부분 고성이 오가고 울어야 결판이 난다. 부모가 싸움 중재로 나서도 별 효과는 없다. 요란스럽게 번지기만 한다. 미디어 전쟁으로 가정 불화가 심각해진 상황이다.


    미디어 경쟁은 멈출 수가 없다. 혼이 나 울고도 돌아서면 또 싸운다. 아프면 주사나 약으로 치료하는 것처럼 효과는 있어도 잠시 뿐이다. 현대인이면 누구나 미디어 중독자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미디어 속 자폐증에 갇혀 살면서 누구를 탓할 수 있을까. 싸우면서 충돌하고 상처로 성장통을 겪는 건 아이들에게 불가피한 일이다. 싸움을 못하게 막는 게 능사가 아닌듯하다. 싸우는 룰을 잘 만들어 싸움을 잘하는 아이로 만드는 게 부모의 지혜가 아닐까 한다.


    누구나 싸우면서 배우고 성장한다. 서로 다른 존재가 부딪치고 다치고 위로하며 사는 게 삶이다. 결혼 40년을 한마디로 싸움으로 점철된 삶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속속들이 잘 아는 사이에 싸움이기에 지겹고 짜증이 느껴질 따름이다. 그래도 사는 한 싸움은 계속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서로 다른 기대와 욕구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싸울 리도 없다.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도 연민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잘 싸우는 힘을 길러야 하는 까닭이다.


    이안이와 이나가 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서로 친밀하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학원이나 놀이방에 갈 때 다정하게 손을 잡고 가는 우애 좋은 사이이기에 둘의 싸움은 괜찮다.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상대를 만만하게 보고 싸우니 나무랄 것도 탓할 것도 없다. 해치지 않을 거라 서로 믿고 싸우는 것이니 부모가 개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쉴 새 없이 극성을 떠는 엄마 아빠다. 너무 괜한 걱정을 하지 싶다. 자식은 부모의 싸움 실력을 보고 똑같이 배우기 때문이다. 부모를 똑같이 따라 하는 걸 보고 부끄러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싸워 상대를 이겨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사람은 듣거나 본 적이 없다. 싸움은 이길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지킬 목적으로 해야 하는 까닭이다. 복싱 선수가 링을 떠나면 주먹을 써선 안 된다. 링에서 주먹은 정당할 수 있어도 링을 떠나면 불법 무기가 된다. 핵무기도 전쟁을 위한 살상무기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평화를 지키는 힘을 지닌 무기일 뿐이다. 칼집의 칼도 칼집을 떠나면 삶을 앗아가는 몹쓸 무기가 된다. 강자 아니라 적응하며 살아남는 게 적자생존의 삶이다.스웨덴 가족도 더 멋지게 잘 싸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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