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로 살기도 힘들어진 사회
아침부터 아내가 아들 방에서 난리다. 오늘은 아들이 예비군 동원 훈련을 받는 날이다. 군복은 있는데 모자가 안 보인다고 걱정을 한다. 훈련을 받는 당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어젯밤 외출하여 들어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으니 집에 오고 있다고 말한다. 아들은 정작 걱정도 안 하는데 엄마가 나서 훈련 준비에 걱정을 하고 있던 것이다. 조금 기다리고 나니 녀석이 들어왔다. 혀를 차는 엄마의 잔소리가 이어진다. 태연한 척 듣기만 하는 아들이다. 끝내는 '알아서 할 건데 엄마가 왜 신경 쓰냐!'라고 되레 큰 소리를 치는 아들 녀석이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을까. 잘잘못과 무관한 것이 부모 자식 간 다툼이다. 잘못이 없어도 '내가 아니면 누가 너를 챙기냐'며 꽁무니를 빼는 쪽은 부모다. 사정은 달라도 비슷하게 사는 게 가족이 사는 모습이지 싶다. 그나마 오늘 아침은 다행이다. 불똥이 번지지 않아서다. 아내에게 싸잡아 덤터기를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내 편에서 거들지 않고 있다 화를 입는 경우가 그러하다. 하지만 애면글면 토를 달아 매를 버는 것보다 침묵하는 편이 속은 편하다. 까탈스럽긴 해도 기다리면 뒤끝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아들한테 손해를 보거나 상처를 입는 일은 허다하다. 그래도 매번 아들을 챙긴다. 등교부터 출근까지 일상 준비는 엄마 몫이다. 가족을 위한 일이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엄마고 아내다. 늦둥이 아들 녀석에겐 유독 오지랖을 넓게 펼친다. 사소한 일까지 신경 쓰고 챙겨줘야 직성이 풀린다. 내비게이션을 쓰면 길 눈이 어두워지는 것처럼 아들이 그 짝이다. 툭하면 빼뜨리기 때문에 엄마의 손이 바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엄마가 아들을 대하는 방식이 그래왔으니 자업자득인 셈이다.
깜빡 잊고 있는 경우가 많으니 챙겨주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심지어 입버릇이나 말투도 변한 것 같다. 아들과 소통하는 걸 보면 취조나 심문에 가까운 수준이다. 아들에게 그 정도로 관심과 정성을 쏟고 있다는 뜻이다. 아끼는 마음에서 챙겨주는 엄마를 고마워해야 옳다. 하지만 익숙해지면 고마움은 당연지사로 바뀌기 마련이다. 관심을 간섭으로 받아들여 짜증으로 변하는 경우가 흔한 일이다. 별 것도 아닌 소소한 일상에서 짜증이 폭발하여 가정이 사달이 나고 마는 것이다.
엄마의 잔소리와 간섭이 싫은 아들만 부딪치는 것은 아니다. 삶 자체가 갈등과 충돌의 연속이다. 누구나 실수와 상처로 점철된 삶을 살아갈 운명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차이로 인한 마찰과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다. 믿고 의지하지 않고 살기 어려운 험난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삶이 허무하고 덧없이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서로 감싸고 부딪치는 인생이기에 사랑도 원망도 하는 것이고, 행복이나 불행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삶에서 보람을 느끼고 살면서 후회를 하는 이유도 서로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의지하는 삶에 필요한 지혜를 쌓기 위해 공부도 한다. 인기나 명예, 재력이나 실력도 결국 기대는 삶에 필요한 능력이다. 아이를 키우려면 부모가 능력을 갖춰야 하는 것처럼 모든 에너지가 공존하기 위해서다. 삶에 피로와 고통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복잡한 갈등과 사고로 혼란을 겪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가족 관계에 위기를 맞게 된 근본 원인이 아닌가 싶다. 결혼이나 출산을 포기하고 혼자 사는 사람이 천만 명이 되는 한국 사회다. 혼술이나 혼밥, 홀로서기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져있는 현대 사회다.
의존하는 삶이 견디기 어려워 외로운 길을 향하는 것이다. 외로움을 해소할 부서가 생겨날 지경이다. 무늬만 가족 운명 공동체다. 가족 관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자본 자유 시장의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리면서 시작된 증상이다. 적자생존 원리에 갇혀 자본의 노예처럼 살게 된 것이다. 자식 뒷바라지에 최소 10이나 드는 게 현실이다. 부모가 일생 동안 돈벌이에 매달려도 부족한 현실이다. 부모가 되어도 부모로 살기가 힘들어진 현대 사회다. 충돌과 갈등을 포기하면서 홀로서기만은 강조하고 있을 때는 아닌 것 같다.
어릴 적에는 가족이나 이웃이 아웅다웅 다투어도 가까운 사이였다. 기댈 언덕으로 든든하게 여겼던 기억이 난다. 현대는 가족이나 이웃이라는 개념조차 퇴색하고 없어졌다. 무관한 관계가 아니라 경계 대상이나 마찬가지다. 유대와 친밀도가 사라져 친하게 지내는 것조차 꺼리는 사회다. 자식 사랑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세상이 아닌가. 참견받지 않는 자유를 권리인양 착각하면서 둥지에서 떠날 생각조차 못하는 자식이 수두룩하다. 누구와도 유대와 친근감을 쌓기 어려운 삭막한 현대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가족에게도 운명 공동체를 떠나 살아갈 수 없다. 이미 정해진 운명 속에서 살아가지만 알 수 없기에 삶이 불안한 것이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한 것이다. 삶이 긴장되고 초조한 원인이기도 하다. 답답한 운명이라고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간은 거스르지 못하는 것처럼 내 인생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정해진 운명에 순응하고 의존하며 살아갈 뿐이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여생을 살아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