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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경 Apr 21. 2016

말라가, 스페인



피카소의고장인 말라가. 말라가에 도착하니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내게 엄청난 피곤이 급습했다. 침대를 떠나기가 무서웠다. 그래도 허기진 배를 채워야 했기에 피곤을 참고 주방으로 내려왔다. 마트에서 쌀과 계란을 사와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과 함께 비빔밥을 만들기로 한다. 테이블을 보니, 한 사내가 장갑을 끼고 요상한 열매를 깎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포크를 가져와 나에게 한 번 먹어보기를 권한다. 키위와 비슷한 맛인데, 키위보다는 약간 더 달다. 선인장이란다. 마트에서 이런 걸 파냐고 물으니 그는


“이것들은 재배된 상품이 아니야. 스스로 자라는 유기농이지. 나에게 장갑과 칼, 그리고 약간의 기술만 있다면, 거리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어때 맛이 괜찮지?”

포르투갈에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그는 홀로 스페인을 여행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답례로 내가 만든 비빔밥을 권했다. 그는 눈에 눈물이 약간 고여 있었지만, 매운 내색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장스럽게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을 했다. 그는 이내 사진기를 들어 재료도 부족하고 조촐한 비빔밥의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비빔밥 이름을 받아 적어갔다. 이후로도 숙소에서 마주칠 때마다 그는 인사의 의미로 눈썹을 한 번 들썩였다.      



십여 일 사이의 많은 이동에 지친 나는 오늘 밤 만큼은 편히 숙소 내에서 쉬기로 한다. 현관에 내려와 출구에 있는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한 남자가 재빠르게 나를 지나쳤고, 그 비명의 주인공은 반대편에서 그를 잡아달라고 소리쳤다. 그 골목에 나 외에는 사람이 없었으니, 분명 나를 보고 하는 말이다. 커다란 배낭을 멘 걸 보니 여행자 같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내가 만일 달라 들었다면, 그 남자를 잡았을 수도 있었을 거 같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을 외면했다. 그 여자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묶는 호스텔에 들어와 체크인을 했다. 그 여자와 같은 방이 아니길 빌었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온정은 여간데 없었다. 나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지나친 사제요 레위인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를 보진 못했지만, 그 기억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나를 괴롭힐 거라고는 그 때는 몰랐다.      



말라가에서 (잠깐)뵌 그녀에게

안전하게 여행을 마치셨나요? 아님, 아직도 여행 중이신가요?

혹시나 도둑맞은 그 물건 때문에, 예정보다 여행을 더 일찍 마치셔야 했던 건 아니었나요...

변명이지만, 저는 당시에 피곤에 절어 녹초가 된 상태였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무척 겁이 났어요. 소매치기를 제 눈으로 직접 본 건 처음이거든요.

그래서 혹여나 그 남자를 붙잡으면, 그가 무기를 휘두를지도, 혹은 제 눈알을 두 손가락으로 찌르지는 않을까 두려웠답니다.

이미 늦었지만, 아직도 체육관에서 유도 기술을 배울 때면 ‘이렇게 하면 그 자식을 쓰러뜨릴 수 있었을 텐데...’하며 그 당시 상황을 다시 떠올리곤 해요.

비겁하게 이제야 말하는데, 정말 미안해요.

물론 이런 일이 다시는 없으면 좋겠지만, 다음에 그러한 곤경에 빠진다면, 저보다는 용감한 사람이 주변에 있기를 빌게요.

저도 다음에 당신과 같은 상황에 빠진 사람을 본다면, 더 용감하게 그 사람을 도우리라고  약속할게요.      

그럼 이만


                         말라가에서 당신을 외면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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