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가 심하다는 건 알겠는데요
친구가 휴대폰 게임에서 또 졌다. 조금만 더 고비를 넘기면 되는데 매번 성공의 코 앞에서 실수를 한 탓이다. 10번째 똑같은 판에 도전하고 이번에도 허무하게 졌다. 한숨이 점점 커지더니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정신병 걸릴 것 같아!"라고 말하며 휴대폰을 툭 던진다. 나는 그 한마디 만으로 그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지독한 상태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정신병 걸리겠다'라는 표현은 자기감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언제부터인가 유행어처럼 들리기 시작한 이 언어는 사실 버전이 여러 개다. '미쳐 버리겠다', '죽고 싶다', 'PTSD 온다', '자살하고 싶다', '뛰어내려야겠다'가 그 예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신병이라는 단어를 타인을 비방하는 목적으로 내뱉었다면, 요즘은 자기 상태를 표현할 때도 쓴다는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는 '병'이라는 워딩을 자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나는 정신과와 관련한 용어가 대중화될수록 반가운 마음이 더 크다.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닌 나 또한 정신질환을 경험할 수 있다는 신호를 사회가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대중화가 그저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재밌다는 이유로 무작정 따라 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정신병이 스트레스의 이음동의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쓸 땐 쓰더라도 정확한 의미를 알았으면 좋겠다. 어디서부터 어느 정도까지가 정신병인지, 병이라고 판단하는 그 기준은 무엇인지 말이다.
정신질환, 소위 말하는 정신병은 '현실 검증능력(Reality Testing)'에 따라 신경증과 정신증으로 나눌 수 있다. 현실 검증능력은 말 그대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인지 능력을 뜻한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어떤 사람을 봤다거나 누군가 자신을 욕했다고 믿고 행동한다면 현실 검증능력이 없는 것이다.
현실 검증능력이 없는 대표적 진단명은 조현병, 망상장애, 환각 또는 망상을 경험하는 양극성 장애 및 우울장애, 해리성 장애, 이인증, 치매 등이 있다. 편의상 '정신증'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다. 이 정신증을 경험하는 당사자는 살아가는 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지만 가족, 친구, 직장 동료와 같은 주변 사람이 불편함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당사자가 망상과 환각을 사실이라고 믿고 하는 행동이 현실 상황과는 맞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기 밥에 독을 탔다고 믿는 사람은 식사를 거부하고 화를 내겠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닐 때 주변 사람은 곤란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 현실 검증능력이 있다면 본인이 불편해진다. 우울장애, 양극성 정동장애, 수면장애, 섭식장애, ADHD, 성격장애, 강박장애, 공황장애, PTSD, 적응장애 등이 그 예시이며 이것을 소위 '신경증'으로 묶어 표현하기도 한다. 부정적 감정에 민감하기 때문에 당사자는 힘들지언정 주변 사람은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는 게 특징이다. 물론 지켜보는 게 힘들 수는 있지만 가장 불편한 사람은 당사자니 말이다.
정신증과 신경증은 양극단에 있지 않고 경계가 희미하다. 신경증이 심해지면 현실 검증능력이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울장애를 경험하는 사람이 그를 괴롭히는 환청을 듣는다거나 자기는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거라 믿고 사람을 기피하는 게 그 예시다.
현실 검증능력이 떨어지면 바로 정신건강의학과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 특히 조현병, 망상장애, 조현정동장애, 중증 치매 등은 희귀난치성질환이라 '완치'의 개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증상이 없었던 시절로 돌아가는 게 아닌 지금보다 더 악화하지 않게 약물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초기에 치료하지 않으면 만성화가 되기 쉽고, 그만큼 예후가 좋지 않기에 더더욱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
만약 기관에 방문하기 전 셀프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면 4가지 방법을 써볼 수 있다. 무엇보다, 정신병에 걸릴 것 같다는 말보다 더 정확한 척도로써 나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환청은 어떤 소리 또는 지시/명령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증상으로 이명과 다르다. 나에게 욕을 하거나 간섭하는 말이 실제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되지 않을 때는 녹음을 하거나 같이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는 식으로 객관화할 수 있다. 환청은 대개 불쾌감을 주지만, 드물게 아첨하는 내용에 즐거움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도 경험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적이 한 번쯤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아르바이트 사장님이 외모를 지적하거나 사사건건 트집을 잡을 때마다 자책이 늘었고 그 사람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착하게만 말했다. 더 심하게 나를 탓하다 무기력증에 갇혔을 때 '가스라이팅'이라는 언어를 알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라 상대가 나를 조종하려는 의도를 가졌다는 걸 안 순간 그의 수법에 놀아나지 않게 나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내 잘못이 아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은 회복의 시작이다.
자신의 상황이 어쩌면 정신과적 증상이 아닌지 궁금한 사람에게 다음 매체를 추천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3인이 출연하는 유튜브 채널 <뇌부자들>, 마음의 이상신호 50가지를 담은 도서 <멘탈 싸인>, 정신건강 뉴스 웹사이트 <정신의학신문>에서 하나쯤은 '내 얘기잖아?' 싶은 증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일기를 평소에 쓴다면 감정일기를 써보는 것을 권한다. 날짜, 상황, 감정,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다. 감정이 10점 만 점에 몇 점인지 표시하면 더 좋다. 최소 2주 이상 기록한 후 기분 변화를 제삼자의 시선에서 본다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원인을 알아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기 쓰기가 귀찮다면 휴대폰 메모장에 단어로만 적어두는 것으로 시작해보기를 권한다.
보통 정신건강복지센터 홈페이지에 조현병, ADHD, 스트레스, 우울장애, 양극성장애, 중독 관련 자가진단을 할 수 있는 메뉴가 있다. 테스트가 끝이 나면 자동으로 점수의 합계와 현재 상태가 어떤지 볼 수 있다. 나의 정신건강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기 용이하다.
2021년 5월 18일 (수) 수련일지
금일 증상 및 약물교육 프로그램에 참관했다. 주제는 ‘병식’이었다. 병을 인식하는 정도로,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병식이 높아지면 퇴원 가능성도 높아지고, 삶의 질이 개선이 되기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보통 병식이 낮은 것부터 높은 수준까지 1~6단계로 나누어 평가하기도 한다.
프로그램에서는 병식을 높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현실 검증력이 없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들은 것을 상대도 들었는지 등 현실과 관련한 부분을 물어보고 나의 현실성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로는 쉽지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어려울 것이다.
다른 환자분들은 ‘나의 질환과 관련한 책을 읽기’, ‘증상을 관찰하고 기록하기’ 등 자기만의 생각을 표현했다. 그 외, 치료진과 약의 효과에 대해 상의하고 결정하는 등 치료진과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의견을 냈다. 모두 병식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는 활동이다.
그중, 감정일기를 직접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감정과 생각, 해결책을 순서대로 작성했다. 감정일기는 아직 낯설지만, 매일 쓰다 보면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힘이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일기>
감정: 조급하다(6점), 불안하다(8점)
생각: 과제의 양이 너무 많고 제 때 제출하지 못할 것 같다.
해결: 1주일에 2개의 과제를 제출하는 걸 목표로 하자. 완벽보다는 완성이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