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와 소통
단어란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공표하여 하나의 단어가 사용될 수 있다해도, 그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문화의 변천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변하며 흘러왔다. 사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변해가듯이, 단어에도 생명력이 있는 셈이다.
‘양반(兩班)’이란 단어는 조선시대에는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통칭하는 말’로 계층을 나타내는 단어로 쓰였으나, 해방 이후 서민들에게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의미가 급격하게 추락하였다. 지금은 “이 양반이 어디서 삿대질이야~”라는 문장처럼 ‘양반=사람’이라는 의미로 변한 것이다.
이렇듯 단어는 그 단어가 만들어진 시대상을 간직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응용하여 쓰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문화상도 포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단어를 알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좀 더 쉽게 알 수 있으며, 어느 상황이든 짧은 말로 표현할 수 있다. 말이든 글이든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낳기 십상이다. 말을 꺼낸 사람이나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기반하여 말을 하고 글을 썼을 터이지만, 그걸 보는 사람은 지은이의 감정은 모르는 채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기반하여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감정이 서로 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읽는 글은 어찌 보면 같은 글자의 배열로만 이루어진 다른 문장을 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다. 흔히 ‘손가락은 해를 가리키고 있는데 사람들은 해는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고 옳으니 그르니 한다’는 말도 바로 이러한 전달의 어려움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런 오해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그게 바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단어들에 대해서는 어휘꾸러미를 갖는 일이다. 그러면 어느 정도 오해의 소지 없이 좀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전에 경험했던 일이다. 카자흐스탄 여행 중에 아스타나로 갈 때 기차를 타고 가는데 교육원에 근무하고 있는 두 명의 선생님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수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을 옆에서 봤지만, 도무지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건 나에겐 소음에 불과한 것이었을 뿐이다. 어휘꾸러미가 없는 사람에게 세상의 모든 말들은 소음에 불과하게 되는 것을 그곳에서 여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면,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면 어휘꾸러미를 늘려 이해할 수 있는 기초조건을 갖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어란 그런 것이다. 단어는 세상을 잘게 나누어 하나의 명칭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단어를 많이 안다고 해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거나, 사람을 공감할 수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단어를 아는 건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조각들을 어떻게 하나의 퍼즐로 맞추느냐에 따라 세상의 진면목이나 개인의 본모습이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은 높아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가능성을 높이기만 한다면, 그건 곧 세상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교육원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100% 이해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어떠한 이야기인지는 맥락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단어가 지닌 힘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닌, 하나의 가능성이기에 우린 그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배우려 한다. 하지만 왜 그냥 단어들이 아닌 고사성어인 것일까?
그건 고사성어는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통해 만들어진 단어이기 때문이다. 성어란 기본적인 이야기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를 안다면 10자 미만의 단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지금부턴 고사성어에 담긴 이야기와 고사성어에 담긴 겉뜻과 속뜻을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내용을 과거의 재밌는 이야기로 읽어도 재밌을 것이고, 그 내용을 통해 활발하게 언어생활에 적용해가며 어휘꾸러미를 넓어가는 것도 신나는 일일 것이다. 과연 이런 과정을 통해 무엇이 변해갈지 지켜보며 함께 고사성어의 세상으로 맘껏 여행을 떠나보자.
15년 4월 27일(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