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서 한 꼭지의 글을 쓰고 발행 버튼을 누르기 전 심장에서는 열차 한대가 지나간다. 벌렁거림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며 숨 쉴 겨를로 없이 마구 달린다. 이때 유용한 마음가짐은 '애라 모르겠다'이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딸깍', 글을 내보낸다. '엎질러진 물'처럼 편안한 상태는 없다.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글을 내보이는데도 열차 한 대가 지나갔는데 서로 얼굴을 보며 글에 대한 평을 받아야 하는 시간이라니. 열차 세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글을 게시판에 올리면서 한 대, 합평 당일 아침 눈을 떴을 때 한 대, 합평 시간이 시작되면서 한 대, 내 글에 대한 합평이 진행되는 시간에는 세 대가 한꺼번에 달리는 거였다.
사이버 수업이다 보니 해외에서 거주하고 있는 수강생들도 네다섯 명이나 되었다. 모국을 떠나 온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그분들의 문장은 대체로 비문이 많았다. 그리고 소설이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운 글도 있었다. 소설을 처음 써 본 나도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역시나 소설을 좀 써 본 학우들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왔다. "수필 같아요....." 그런데 이들은 그 절망의 말을 던지기 전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소재가 참신합니다, 제 이야기처럼 실감 났습니다'라는 등의 칭찬을 잊지 않았다.
어떤 학우는 A4 한 장 분량의 도입 부분만 달랑 제출했다. 도저히 이어나갈 수 없었다, 라는 것이 변명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그 글을 무시하고 다음 글로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있어요. 저도 글을 쓰다 보면 절벽에 서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하면서 달랑 한 장의 미완성 글에 대한 합평을 진행했다. 사건의 전개를 유추했고 인물들의 캐릭터를 잘 살리면 흥미로운 소설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 학우는 얼굴이 벌게져서는 울먹울먹 하며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수필 같은 글 몇 편과 동화 같은 글, 그리고 교수님도 인정한 '기성 소설가의 작품' 같이 완성도가 있는 소설의 합평이 끝난 후 내 차례가 돌아왔다. 이미 게시판에서 댓글로 '참신성이 없다'는 평을 받은 터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좀 전에 울먹이던 학우가 "글을 너무 잘 쓰신다, 그런데...." 하면서 언제 운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내 소설에 대한 검은 말들을 늘어놓았다. 교수님 또한 다른 학우들의 글에 대해서는 다독이면서 평을 해주었으면서도 유독 내 소설에 대해서는 인물, 사건, 배경 설정의 미흡과 핍진성의 결여에 대해 지적만을 해주었다. 교수님의 억양이 언짢은 것도 같았다. 참혹했다.
며칠 후 합평 수업의 녹화본이 게시판에 올라왔다. 퇴고를 하기 위해 쓴 침을 삼키며 내 소설에 대한 부분을 다시 보았다. 그런데 실시간 합평 시간에 내가 느꼈던 분위기와는 달리 교수님의 표정은 온화했고 내 글에 대한 평도 혹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작위적인 결말 때문에 앞부분에 잘 쌓아 올린 것마저 빛을 잃는다"라는 말이 새롭게 들려왔다. 분명 교수님은 '앞부분에 잘 쌓아 올린 것'이라고 했다. 휘어졌던 허리가 펴졌다. 순간 입안의 침도 달아졌다. 왜 그때는 이 말이 들리지 않았는지. 그 몇 마디의 칭찬에 자신감을 얻고 무사히 퇴고를 마무리했다.
합평 말미마다 교수님이 거의 동일하게 말하는 것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무엇 무엇의 장점이 있다'라는. 이 마지막 멘트에 합평을 받고 기죽어있던 학우들의 얼굴이 펴지는 것을 보았다. 게시판에 다시 가보니 달랑 한 장 짜리 미완성 분을 제출했던 학우의 글에 몇몇 학우들이 응원의 말들을 달아 놓았다. 따뜻했다. 분위기상 나도 댓글을 쓸까 하다가 그녀의 검은 말들이 생각나서 관두었다.(쫌생이)
다섯 차례에 걸친 합평의 시간이 모두 끝나고 평가에 대해 교수님이 한마디 했다. "상대평가이기에 당연히 C 학점도 있을 겁이다. 그러나 그것은 소설이 아닌 다른 과제에 대한 평가로 생각하고 이해해 주세요. 어떤 학점을 받던 부디 소설 쓰기를 멈추지 마세요.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전에도 말했지만 모두 고만고만해요."라며 웃었다. 소설가인 담당교수의 얕은 팬이었던 나는 그의 덕후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학생들을 배려하면서도 섬세한 지도를 하는 그의 우아함에 감동했다. (실은 덕후가 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블로그 이웃님들은 아실 것이다.)
이곳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햇수로는 3년 차, 만으로는 1년 하고도 9개월이 되어간다. 몇 번은 '탈퇴한 사용자'가 되려고도 했다. 글을 쓰는데 들인 시간만큼의 열매들이 보이지 않고 허무함들이 마구마구 몰려오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곳에서 서성이는 이유는, '달랑 한 장 짜리 미완성 분'의 소설을 제출한 학우가 합평 시간에 느꼈을 그 심정과도 같다. 내 가능성을 말해주고 섬세하게 공감해 주는 이들의 마음 때문이다. 이 소심자가 이렇게 이곳에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이유다.
이곳에는 지망생들이 많다. 나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의 초창기 글들은 어설프다.(물론 나의 글은 늘 어설프게 느껴지지만.) 그러나 한 꼭지 한 꼭지 쌓이면서 나무처럼 자라는 것을 본다. 비문들도 줄고 사유가 담긴다. 공감이라는 물과 칭찬이라는 햇빛 덕분이다. 혹자는 비웃음을 흘릴지도 모른다. 이곳에는 과한 칭찬들만 넘쳐난다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날 선 지적들이 난무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지망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계속' 쓰는 행위이다. 글의 수준은 이 지속성에 비례한다고 믿고 있다.
합평 시간에 교수가 건질 것 없는 척박한 글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아내고 공유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많은 지망생들의 로망인 하루키 아저씨처럼 '정신의 터프함'을 장착하기까지는 많은 경험과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프로에게는 당연히 냉정한 비평, 혹은 적나라한 혹평도 약이 되겠지만 아직 여려 터진 지망생에게는 독약이 될 수 있다.
<대통령의 글쓰기>저자 강원국은 "글이라는 것은 정답은 없다. 글의 잘못을 지적받아 고치는 것보다 장점을 키워 단점을 덮으며 쓰는 것이 글쓰기가 빨리는다."라고 했다. 이 말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타인의 글에서 단점보다는 장점을 찾아내어 칭찬하는 것이 그의 글을 성장하게 한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마냥 놀고 싶어 하는 중학생 아들을 스스로 책상에 앉게 하는 것도 지적질로 질퍽이는 잔소리가 아닌 담백한 칭찬 한마디라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이런, 점점 글이 뻔한 이야기로 흐르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하트까지 눌러주시는,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게 힘을 주시는 나의 문우님들, 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결국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