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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Dec 23. 2021

자기 중심으로 도는 우주는 우주일까

<완전한 행복>을 위한 그녀의 '노력'



 '행복이라는 것이 과연 내게도 올까.'

중학생 때까지 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행복하지도 않았다. 행복을 부정하는 갖가지 생각들 속에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것은 '나는 대학을 갈 수 있을까'였다. 아마 그 당시 최고의 행복을 '대학 가는 것'이라 생각했었나 보다. 대학에 가기를 간절히 바랐던 언니의 꿈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나 또한 그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시절 나는 괴이한 결벽증이 있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을 가지치고 싶어 했다.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없어지기를 순간순간 원했다. 나를 무시했던 이들이 증발했으면도 했다. 걸어가다 코가 깨지기를. 교통사고가 나기를. 다른 곳으로 전학 가기를. 그 선생님의 아이가 아프기를. 이러한 나를 발견하고는 당시에 유행했던 영화 '오멘'이 생각나 섬찟했다. 혹시 나도 그 아이처럼 악마의 자식일까 하고.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6반 하고도 6번이었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천사라 했다. '우리 진이는 법 없이도 살 아이야. '라고. 그 말이 좋으면서도 뜨끔했다.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내 사악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순했고 순종했다. 거의 매일 쓴 일기에서 간간이 나는 죄인이었다. 구체적인 사건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죄에 대한 용서를 빌곤 했다. 성경에서는 '마음으로 지은 죄도 죄'라고 했기에.


중학교 일 학년 때인가. 수업시간 도중 선생님께 말하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우리 반 교실 앞 복도에서 교감 선생님과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돌아다니지 말라는 말 안 들었어!' 하면서 내 뺨을 후려쳤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그저 맞는 수밖에 없었다. 그 눈에 살기가 있었기에 벌벌 떨기만 했다. 수업을 땡땡이치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단속하는 중이었나. 그렇다고 열세 살 아이의 여린 뺨을 치는 그는 선생인가. 그렇지 않아도 그늘진 자의식에 눌려있던 나는 그를 저주했다. 제발 사라져 주기를, 내 눈에서 꺼져주기를. 그날도 회개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다.


언니가 취직을 하고 아버지 직장에서 자녀 학자금이 지원되기 시작하면서 오빠, 나, 동생은 대학을 갈 수 있었다. 내 것이 아닐 것만 같은 행복들이 이루어져 갔다. (나는 이 시절의 언니에게 항상 빚진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 한동안 나를 괴롭히는 것들이 제거되는, 증발하는 상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회사를 다니면서 슬슬 그 병이 도졌다. 결국에는 그 불행의 근원지에서 탈출했지만.



출간된 지 한 달 여만에 28쇄를 찍었던(지금은 몇 쇄일까?) 정유정의 <완전한 행복>을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 만에 읽어 버렸다. 이미 소설의 모티브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얼굴은 상상할 필요가 없었다.

육체적으로 건장한 사람들이 가녀린 여자에게 여지없이 '빼기'를 당하는 것이 어이없었다. '가스라이팅'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묘사들이 있었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았다. 아마도 '겪지 않았으면 말을 말아야 하는 것'일 게다.

한편 뜨끔했다. 한때 온갖 상상으로 나를 괴롭혔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빠져주기'를 바랐던 내가 생각나서. 그래도 나는 그것이 악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고 밤마다 용서를 빌었다. 아마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 흐름이며 행동 양식이지 않을까. 그러나 소설 속 그녀는 '노력'을 한다. 주위 사람들을 자신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인다. 그녀의 세계에는 자신과 자신의 졸개들만 있어야 한다. 배반하는 졸개들은 제거한다. 이 얼마나 기가 찬 '행복을 위한 노력'인지. 자기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야 하기에 걸리적거리는 별들을 파괴한다. 혼자 남은 우주는 우주인 걸까.


"지옥의 전체 철학은 '하나의 사물은 다른 사물과 별개'라는, 특히 하나의 자아는 다른 자아와 별개'라는 원칙을 인식하는 데 있다."  C.S. 루이스의 소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사촌 웜우드에게 훈계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을 파멸시키기 위한 악마의 계략은 '우리에겐 행복할 권리와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함께 있다는 것 (완전한  행복 - 작가의 말)'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그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에게 양해를 구했을까. 물론 '그 사건'은 씨앗일 뿐 인물, 사건, 배경 모두 허구라고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특히 남겨진 아이는 무슨 죄란 말인가. 아마 동의를 구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타인의 행복에 대한 책임이 있으니까.






서사 중심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지만 정유정의 소설을 한 번도 읽지 않았던 터라 구매까지 해서 읽었다. 인기 있는 신간들은 도서관에서 대출받기가 힘들고 중고도 비싸기 때문에.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했다. 단문 처리가 탁월했다. 긴장과 긴박감 속에서 빨려 들어가 읽었다. 왜 그녀의 이름 앞에 '역시'라는 수식어가 따르는 줄 알겠다. 감정이나 사유 중심의 소설을 싫어하는 딸은 이 책을 읽고 환호했고 남편은 그냥 읽기 싫단다. 기분 나빠진다고. 나도 다시 읽고 싶지는 않다.

따끈따끈 할 때 알라딘 중고 매장에 가야지. 얼마를 받으면 행복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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