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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Nov 18. 2022

호수공원의 차력사



주말 오후 호수공원 트랙을 돌다가 번지점프대가 있는 작은 광장에서 한 남자가 무언가를 준비하는 것을 보았다. 커다란 검은색 훌라후프 같은 링과 검은 플라스틱 막대가 땅에 놓여있었고 정체 모를 푸른 액체가 페트병에 담겨있었다. 커다란 링과 액체를 보고 내 딴에는 남자가 무엇을 할 것인지 잘 안다는 듯이 남편에게 말했다. 저 아저씨 좀 있으면 비눗방울 아트를 할 거야. 내가 런던에 갔었을 때 저렇게 커다란 링으로 비눗방울을 만드는 걸 봤거든. 5년 전에 회사에서 보내주었던 런던 연수를 아직까지 우려먹고 있는 나를 남편은 미심쩍어했다. 과연 내 예상이 맞을 것인가. 잠시 지켜봤지만 남자는 주위만 살필 뿐 작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참을성이 없는 우리는 최근 리뉴얼을 끝냈다는 공원 내 책테마파크 도서관을 향했다.


소규모의 도서관이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예전보다 꽂혀있는 책이 많았다. 어린이 코너를 지나 일반 열람실 문학 코너로 가니, 내가 주로 이용하는 도로변 도서관에서는 도저히 빌려보기가 힘들었던 책들이 새것의 냄새를 풍기며 꽂혀있었다. 더군다나 리뉴얼 전에는 대출이 안 되는 도서관이었는데 이제는 가능하다 했다. 나는 살짝 흥분되었다. 세상에, 세상에, 입술로 호들갑을 떨며 책들을 꺼내 품에 안았다.


뿌듯한 마음으로 도서관을 나오니 번지점프대 쪽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연 비눗방울 아트일 것인가. 꽤 많은 사람들이 원을 그리며 몰려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남자가 커다란 링을 큰 대(大) 자로 탄 채 구르고 있었다. 내 예상은 헛방이었다. 남자는 인상 좋은 얼굴로 핫핫 웃으며 보기보다 어려운 묘기라고 관중을 향해 소리쳤다. 묘기는 자주 실패했다. 안 되겠는지 필살기인 지옥의 불쇼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페트병의 액체는 비눗물이 아닌 기름이었다. 그는 검은 플라스틱 막대 양쪽에 기름을 묻히고 불을 붙였다.  불타오르는 막대를 회전시키고 위로 던졌다 받아내는 묘기였는데 남자는 역시나 서툴렀다. 불타며 떨어지는 막대를 잡지 못하고 피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더 큰 박수로 호응했고 남자는 계속 시도했다. 어깨로, 다리 사이로 불타는 막대를 돌리는 그의 묘기에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정자세로 섰다. 그러나 곧바로 말을 하는 대신 숨을 짧게 일정한 간격으로 들이쉬었다.



- 흐읍흐읍흐읍, ……, 저는 차력사입니다. 그리고 세계 인구의 4% 정도 된다는, ……, 말더듬이입니다. 흐읍흐읍…….


말 더듬는 것을 고치기 위해 대중 앞에 서는 차력을 시작했다고, 많이 좋아지고 있고 계속 차력을 할 것이라고 했다. 과호흡 때문에 숨을 고르는 그를 사람들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고, 말이 잘 나오지 않자 괜찮아요 하며 박수로 응원해 주었다. 늦가을의 햇살은 눈이 부셨고 나의 등은 척추를 따라 뜨거워지고 가슴은 물이 차올랐다. 이내 코가 시큰해졌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불안을 이기려 불안 속으로 뛰어든 남자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의 계속되는 미숙한 불 쇼를 보며 제발 입으로 기름을 머금고 뿜어내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 바람은 이루어졌다.


대만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는 나의 딸은 최근 공황장애 증상이 재발되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죽을 것 같다고 했다. 공부를 포기하고 집에 오고 싶다고도 했고 버티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다고 울었다. 어떠한 상황이 아이를 다시 짓누르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쓰러져도 누구 하나 도와줄 것 같지 않은 공포감이 가장 크다고 했다. 나는 아이에게 기숙사 룸메이트에게 공황장애가 있음을 알리라고 했다. 아이는 감추고 싶었겠지만 절박했다. 홍콩인인 룸메이트는 아이를 위로했고 그날 밤은 무사히 넘어갔다. 다음날은 마침 같은 학교에 교환교수로 와있는 학과 교수를 만나 상담을 했다. 교수의 아들도 공황장애를 앓고 있기에 딸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해 주었고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수업을 재끼기도 하면서 스스로를 놓아주라고 했단다.


 - 엄마, 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장애를 알리면서 아이는 불안을, 공포를 맞서고 있다. 저 차력사처럼.


차력. 힘을 빌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빌리면서 살아간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누군가로부터, 혹은 무엇으로부터 빌린다. 딸은 주위 사람들의 관심과 위로를 빌리며 힘을 얻고 있다. 말을 더듬고 있는 저 차력사 또한 그러하겠지.


남자가 불 쇼를 마치고 후원금을 부탁한다고 했다. 이왕이면 배춧잎으로. 현금이 없는 분들은 계좌이체도 가능하다고 숫자가 적힌 팻말을 가리켰다. 뜨겁게 호응하던 사람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삼삼오오 모여 핸드폰을 들여다보기도 했고 트랙을 따라 다시 걷는 사람들도 있었다. 차력사에게서 받은 감동과 놀라움을 그대로 빌린 채 각자의 모양들로 뒤돌아섰다. 남편은 핸드폰을 열어 은행 앱을 실행시켰다.


이 책들도 2주간 빌릴 수 있는 거지? 내가 대출한 네 권의 책을 왼손으로 들고 있던 남편이 오른손으로 책을 옮겨 들며 말했다. 나는 남편의 손을 빌리고 있었다. 때마침 유효기간이 다 되어가는 커피 쿠폰이 생각났다. 

내가 커피 사줄게. 우리는 스타벅스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식어버린 내 등은 늦가을의 햇살을 여전히 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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