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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Oct 11. 2022

시절을 앓고 있는 거죠, 언니?

날감정의 시간



처음에 엄마로부터 올케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지난 명절에 부모님 댁에서 음식을 장만하다가 돌연 사라진 그녀의 이야기가. 장을 봐오고 야채를 다듬고 썰고 전을 부치던 올케가 잠시 자기 집에 갔다 온다고 하더니 그날 다시 부모님 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엄마 혼자 나머지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쳐야 했단다. 기다리다가 무슨 일인가 해서 전화도 해보았지만 받지 않았고 몇 시간 후에야 통화가 되었는데 올케가 말하기를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자버렸다는 것이다.


 - 갱년기라 그런단다.

 - 아, 아하…


'갱년기'라는 단 세 음절의 단어에 황당했던 올케의 행동이 명징하게 이해되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사루비아꽃이 선혈처럼 뚝뚝 떨어져' 학교를 휴학했던 강석경 소설 속 주인공 소양을 이해해 버린 스무 살 나의 데자뷔 같았다. 스무 살. 표면적으로는 맥락 없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나름의 고통과 허무로 구역질해대던 시절. 그 이해되지 않았던 시절이 문득 그리워질 무렵 올케의 소식은 자못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생각과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행동으로 해버리는 것. 그러한 행동이 초래하는 간섭, 뒷담화, 잔소리, 꾸지람 등을 개의치 않고 순간의 나에 충실해 버리는 것. 엄마의 딸로서 내 엄마를 잠시 곤궁에 빠뜨린 올케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매년 두어 번씩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명절 노동자의 동지로서는 그녀가 몹시도 대단해 보였다. 나 같은 겁쟁이는 절대 못 할 것이다. 시절의 날감정이 고농도로 덮치지 않는 한. 


요즘 부쩍 올케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많이 하시는 엄마에게 나는 야속하게도 받아들이시라고 말해버렸다.

감정을 버틸 수 있는 막이 얇아지는 또 하나의 계절을 너그러이 품어주시라고. 예전 같으면 웃으며 그래요 어머니, 했던 그녀는 거절의 말을 자주 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 뭐 섭섭한 거 있니, 솔직히 다 얘기해봐.

그녀는 거침없이, 포장 없이 답했단다. 오래된 섭섭함, 너무 묵어서 미움으로 커져 버린 감정에 대해.


툭 불거진 시간의 마디, 특정하게 불릴 만큼 도드라진 시절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는 관대해진다. 같은 언어권에 있는지가 의심되는 중3 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사춘기보다 더욱 막강하다는 갱년기를 관통하고 있는 올케의 돌발적 행동이 밉게만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나는 아직 시절의 문 앞에서 대기 중인 것 같으나 아들을 참다가 폭발해 버린 후 내 모습이 창피해지면 '네가 이해해라, 엄마가 그 시기이지 않니'라며 시절의 핑계를 댄다. 이름이 붙여진 시절은 쓸만한 묘책이 되기도 한다.


시절에 기대어 날감정을 터트려버린 올케언니의 마음은 풀렸을까. 미움의 농도는 옅어졌을까. 그 뒤로 그녀가 다시 맑게 웃기 시작해 마음이 놓인다고, 그러나, 그러나 살갑던 예전의 그녀가 그립다고 엄마는 말했다. 그 목소리는 가벼웠으나 물기가 있었다. 나 또한 그전처럼 톡방에다 예쁜 꽃나무들과 텃밭에 키운 야채들로 먹음직스럽게 만든 음식을 자랑하지 않는 그녀의 지금이 좀, 아니 많이 속상하다. 그녀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가족 톡방에 감탄사와 이모티콘을 남발하게 했었는데.



 - 말하지 말 걸 그랬어요. 말하고 나니 예전처럼 못하겠더라고요.

최근에 만난 지인도 시어머니에게 그간 묵힌 감정들을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전에는 시어머니와 수다를 떨다 같이 낮잠도 자고 그랬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상대방이 너그러이 받아들여도 날감정을 털어버린 당사자는 후에 오히려 말랑한 감정은 감추게 되는 걸까. 그동안의 좋은 추억들과 따뜻했던 시간에 겸연쩍어지는 걸까. 올케의 솔직한 토로에 우울해진 엄마에게 당신도 며느리에게 묵은 감정 있으면 털어놓으시라 했더니 '그러면 안 돼. 나까지 그러면 더 멀어지는 거야'라고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도 명심하라는 듯이.


'할많하않'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남편이 내게 종종 쓰는 말인데 기분이 좀 나쁘기는 하지만 진짜 참아주는 것 같기도 해 그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는 웃고 만다.



비가 내린 후 바람이 예전 같지 않다. 본격적으로 가을이 깊어가려나 보다. 마음의 구멍이 커져 목소리에서도 바람 소리가 느껴지는 올케언니에게 때마침 다가온 생일날 향수를 선물했다. 언니의 미소 뒤 한숨에 무심했던 미안함 시절의 동지애와 엄마 잘 부탁드린다는 아부까지, 여러 의미를 담아 가격에 무리를 좀 했다.


툭 불거진 시간의 마디를 너무 아프게 앓지 말기를. 예전같이  예쁜 꽃나무 자랑해 주길.

 




표지그림 : Vilhelm Hammershø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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