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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나무 Feb 07. 2023

결국, 불가능하나 소멸하지 않는, 사랑

대니 드비토 / 황정은



매주 토요일마다 아침식사를 한 후 열 시 즈음 가족예배를 드린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해온 일과라 투덜이 아들도 기꺼이 참여한다. 아이는 교회에서 드리는 주일 예배보다 가족예배가 차라리 낫다고 한다. 아이들이 언제부턴가 신을 부정하고 있어 몹시도 괴로운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신께 맡긴 상태이다. 그저 부모의 바람을 형식적으로라도 따라와 주는 아이들이 고맙다. 효도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예배 중 우리 넷은 대체로 말씀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을 교환한다. 그 의구심들 중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아마도 '사후'에 대한 것일 거다. 우리 부부는 성경 속에서 진리를 찾으려고 애쓰며 살기에 성경 그대로의 사후 세계를 이야기한다. 딸은 오락가락한다. 어떤 때는 부활이나 환생을 바라다가도 먼지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도마와 같은 현실주의자 아들은 신이 자신과 대면해 주면 믿겠다며 '먼지론'을 옹호한다.


나는 자주 성경의 진리를 배반하는 상상을 한다. 알려지지 않은 깊은  숲 속에 웅숭깊게 자리 잡은 커다란 나무로 환생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했던 이들이 이름 없는 새로, 이끼들로, 석양으로 나를 찾아올 것이다. 환생을 해도 게으르고 소심한 천성은 지니고 싶다. 그는 바람이 되어 나를 흔들 것이다. 나는 바람을 가장 좋아하니까.



펭귄맨이었던 배우의 이름이 뭐였더라, 하고 생각한 순간에 깨달았다.

나는 죽고 만 것이다.

무덥고 맑은 오후였다. 잔, 잔, 잔, 잔, 하고 냉장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p.35)



그러고 보니 죽은 후 '원령으로 떠도는 나'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내게는 죽는다는 것이 현세의 시공을 떠나는 것이라는 개념 같은 것이 들러붙어 있나 보다.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을 읽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일상적인 단어들의 조합만으로 어떻게 그렇게 낯설고 시적인 문체를 띠는지. 위 회색의 문장들은 황정은 그녀가 이 소설집에서 가장 애착을 갖고 있다는 「대니 드비토」의 도입부다. 話者는 死者다. 죽은 나 '유라'는 유도씨가 오면 '번개처럼, 몇 차례 꺾이면서, 빠르게' 그에게 달라붙는다. '붙어서 비비고 조인다.'


사랑은 그 대상과 일체가 되는 것을 꿈꾼다.  '불가능성'. 그것은 사랑의 속성이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 불가능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불행은 그 불가능성을 부정하는데서 온다. 그와 나는 절대로, 절대로 닿지 못한다. 원령이라면 가능할까. 그것은 고체도, 액체도 아닌 젤과 같은 상태일 것 같다. 그래야 그의 '윤곽'에 철썩 잘 달라붙을 수 있으니.


어쩌면, 어쩌면, 어깨 위쪽이란, 심령적인 면에서 특별히 민감한 부분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균등하게 나눠 붙었다.(p.43)


기말과제를 하면서 모니터 앞에서 너무 한 자 세로 있었는지 거의 3주째 오른쪽 뒷목이 뻣뻣하고 아팠다. 되지도 않는 것들을 하느라 괴로웠다. 심장보다는 뇌가. 어쩌면 뇌라는 것은 잉태를 꿈꾸는 자궁의 연속적 버전일지도 모른다. 생리 불순은 불임을 초래하기도 하기에 뭉치고 아픈 뒷목은 풀어주어야 한다. 뇌의 불임을 막아야 한다. (요 문단은 소설의 맥락과 전혀 닿지 않지만 그대로 놔둔다. 뇌가 오래간만에 신선한 '아'를 잉태했기에.)


그거 봐. 쓸쓸하다느니, 죽어서도 그런 걸 느껴야 한다면 가혹한 게 맞잖아. 나는 이생에 살면서 겪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내가 죽을 때는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어. 이왕 죽는 거, 유령으로 남거나 다시 태어나 사는 일 없이,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야.(p.57)


천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 같이 없다면 그곳은 과연 천국일까요,라고 교회 집사님과 논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요..." 결국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결론을 맺으면서 우리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도록 되어있는 것이니 알 수 없는 채로 남겨둘 것.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바라는 먼지론이 가장 깔끔할 것 같다는 불경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바람처럼 왔으니 먼지처럼 사라져도 괜찮지 않을까. '말끔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먼지'라는 어떤 물질의 형태로 우주 어딘가에 달라붙어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욕과 사랑, 희망. 이런 기체적인 것들이 온갖 물성을 지닌 인간에게 스며들었다가 결국은 인간의 죽음과 함께 '말끔히 사라지는 것'. 소멸.


결국, 생이라는 것은 소멸이 꾸는 태몽일 뿐.

문제는 그 꿈이 너무 생생하다,라는 거.



말끔히 사라질 수 있기를.

사라져 버리기를.

부디.

부디.

대니 드비토.


*


유라.

양지바른 곳에서, 유도 씨가 말했다.(p.58)



소설의 제목이며 도입과 말미에 나온 이름 '대니 드비토'. 펭귄맨.

굳이 그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누구의, 모두의 이름일 수 있겠다.


유라.

결국. 이름.

알 수 있었고, 알 수 없었던 모든 것을 담은.


결국,

불가능하나

소멸될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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