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eensian Sep 22. 2020

가을엔 호호 불어 티타임을...

작은 찻잔은 언제나 나보다 크니까요


코로나 블루 탓에 모두가 정신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요즘 체감하는 단 하나의 기쁨을 찾자면, 바로 하늘을 보는 일이다. 계절의 흐름 앞에 바람의 결도, 하늘빛도, 구름의 얼굴도 매 순간마다 달라진 가을이니까. 절로 감탄하는 순간을 담으려고 손엔 늘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찰나의 신비로움이 작은 프레임 안에 온전히 들어올 리 없지만 자연이 내어주는 그 품을 하늘 빛깔과 구름무늬로 아주 잠시라도 기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하면서도 찬 공기에 몸이 부르르 떨리곤 한다. 얼음 들어간 시원한 커피와는 이미 안녕을 고했고, 아직까지 여름옷을 입고는 있지만 이따금씩 카디건을 꺼내 어깨에 걸치는 일이 자연스러워진 요 며칠의 풍경.


아침엔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고 따뜻한 커피를 찾다가도 저녁 느지막이 즈음엔 뜨끈한 차 한잔에 손이 간다. 아이의 재채기로 환절기가 시작됐음을 알아차린 무렵엔 새콤한 오미자청을, 창을 열고 자느라 새벽 찬 공기에 기침이 살짝 돌았던 날엔 달큼한 생강 꿀청을 꺼내어 목을 뜨끈하게 데워주었다.


본래 차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뜻하지만 요즘은 찻물 외에도 꽃과 과실수, 식물 등 자연 재료를 물에 우려먹는 것을 통틀어서 차라고 부르며 종류만 해도 매우 다양해졌다. 전통적으로 차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약용으로 긴히 쓴 만큼 다양하게 변모하는 차의 쓸모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우리가 차를 마시며 잠시나마 누리는 건 그저 작고 여린 자연, 이파리와 열매와 꽃에 응축된 시간의 힘을 빌릴 뿐이다.


여전히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 기대고 빚을 지고 있는 우리.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살피지 못한 몸과 마음의 속도를 뒤늦게나마 늦춰보며 한 템포 느리게 시간을 음미하는 것. 차를 마시는 시간은 한번 더 몸의 신호를 읽고 한숨을 고르게 내쉬게 된다. 눈앞에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느라 짧게 끊어뜨리던 호흡마저 느려지니 몸도 마음도 긴장의 끈을 풀고 슬로 모드로 공기 한가운데 자유로이 유영한다. 커피와는 다른 빛깔, 다른 톤, 다른 온기로 시간을 붙들어두는 마력이 있달까. 커피가 잠을 깨거나 일을 할 때 효율을 높이려고 좀 더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거나 또는 한 톤 다운된 기분이라도 조금 끌어올리려고 의지하는 친구라면, 차는 온전히 몸과 마음의 위안을 얻고자 완전히 몸을 기댈 수 있는 친구 같다.


아이들도 오직 차가 주는 맛 또는 위안을 좀 아는 눈치다. 콜록 기침이 나오는 날이면 큰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오미자차나 유자차를 찾고, 으슬으슬 몸이 좀 춥다고 느껴지는 날 작은 아이는 유난히 보리차를 꼭 끓여달라고 보채니까 말이다. 뜨끈한 새콤달콤한 맛, 따뜻하면서도 구수한 맛을 찾는 날씨, 그 날 몸의 기운이 너무도 자연스레 차를 부르는 것이다. 작고 여린 손이 컵을 붙들고 호로록- 차를 마시며 제 자신을 달랜다. 아플 때 약은 약대로 도움을 주고 차 역시 지친 몸과 마음을 안온하게 지켜준다.



작은 찻잔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애정 하는 줌파 라히리의 책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제목을 조금 바꿔 본 말이다. (여담이지만... 책도 좋아하지만 제목이 주는 깨달음이 커서 더 좋아하게 된 말. 어린아이들의 세계를 마주하며 배울 때마다 ‘이 작은 아이들은 나보다 늘 크다’는 것을 체감하기에 이보다 더 단호한 표현은 없으리라)

차를 마시며 옹졸하고 좁은 마음 그릇보다 훨씬 크고 넉넉한 힘을 지닌 찻잔을 응시해본다. 주변에 건강 잘 챙기라는 말만 열심히 하고 정작 내 건강은 돌아보지 않았던 이중성과 꼭 몸이 아프고서야 단련하지 않았던 몸에 대해 후회하고 반성하기 급급한 어리석음을 반성한다. 매일매일 홈트 30분으로 시작했던 운동 계획도 어느새 흐물어져 있으니 몸이 자동적으로 기억할 리가 없다. 아직 남은 4개월이란 시간이 있으니 지속 가능한 작심삼일의 원칙을 다시 가동해야겠다고 마음 짓기에 들어간다.


아직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과 집콕 일상을 이어가는 와중에 출구 없는 답답함이 계속되다 보니 종종 생기를 잃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한낱 지나가는 감정일 뿐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쉬이 털어내지 못하고 흔들리고 만다. 숙제와 공부, 끼니를 챙기고 집안 먼지를 털어내고, 쨍하게 내리쬐는 가을볕에 빨래 옷가지를 널어놓고, 간신히 붙들어둔 나만의 고요한 시간...... 찻물을 끓이고 찻잔의 온기를 최대한 오래도록 끌어당겨본다. 읽다 말았던 책을 펼치고 휴대폰 메모장을 연다. 노트북을 켜고 정리하는 시간조차 아까우니 이럴 땐 간편하게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창이 좋다.



저당 잡히지 않는 시간의 조각을 그러모았으니 이때야말로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가 않다. 아이들과 서로 각자의 시간을 갖기로 약속은 했지만 혹시라도 방해받을 낌새가 보일라치면 곧 적을 경계하는 고슴도치처럼 예민도를 가늠하는 촉수를 바짝 세워 으르렁하고 경고음을 켠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좋은 엄마, 좋은 사람이길 포기하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증발하는 시간 앞에 또 나의 시간이, 나의 하루가 처참히 또 무너져버림을 너무도 잘 아니까. 남들 모르게 구겨진 영혼을 펴고 건조하게 바짝 말라버린 마음에 천천히 따스한 물기가 스민다. 따스한 차에 기대어 쉬어감이 내게 절실한 이유다.



그림책 <커다란 나무>에서 뿌리째 나무를 뽑아서 집 앞에 심으려는 탐욕스러운 재력가의 마음을 무너뜨린 것도 찻잔의 힘이었다. 돈이면 다 되는 인생을 살았던 남자의 오만함을 여든의 할머니가 차 한잔으로 뒤흔들고 만다. 나무뿌리가 옆집 나무와 얽혀있어서 일이 어렵게 되자 나무를 사겠다더니 그마저도 거절당하자 그는 나무도 집도 심지어 할머니까지 모셔가겠다는 조건을 단다. 남자는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비서를 책망하고는 직접 주인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가 찾아올 거라는 걸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는 듯, 할머니는 그에게 팔십 평생을 구운 아몬드 비스킷과 차를 대접한다. 일생을 공짜라고는 모르고 살아온 그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뜻한 다과를 권한 사람은 할머니가 처음이었던 것.



그림책 <커다란 나무> 할머니의 찻잔, 두 눈에 비친 두 그루의 나무



두 나무는 할머니 얼굴에 있는 수없이 많고 가는 주름으로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비스킷을 먹고 차를 마시는 시간 동안, 그는 할머니의 눈에 비친 두 그루의 나무를 보며 재력을 좇아  앞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을 마주한다. 그는 지금껏 마음과 눈에 무얼 담아 왔던 걸까. 왜 그렇게 집착하며 살아온 걸까. 그 어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마음, 앞마당을 지키는 작은 나무가 드리우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늘에 만족하는 자세, 그와 같은 철학이 새겨진 얼굴... 할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차를 마시다가 탐욕에 찌들고 구겨진 자화상을 발견한 부자 아저씨. 고요한 응시와 성찰 끝에 그의 손엔 새로운 선택지가 주어진다. 인생을 바꿀만한 차 한잔, 작은 찻잔의 묘약이라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자, 이제 신경 쓰지 마. 오늘은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거야. 아직 실수를 한 개도 저지르지 않은 내일 말이야. 네가 늘 하던 소리잖아. 아래층으로 내려가 저녁이나 먹자. 향기 좋은 차 한잔이랑 오늘 구운 자두 파이를 좀 먹고 나면 기분이 다 풀릴 거야.


<에이번리의 앤> 엉망진창 하루  중에서
루시 모드 몽고메리  글 | 김서령 옮김
허밍버드 (2014)



가을엔 두 손 가득 찻잔을 감싸고 호호 불어 티타임이 좋다. 토닥토닥거리며 가만히 조용히 곁을 내어주는 차 한잔. 옆에서 보채거나 급하게 굴지 않아서, 언제고 다정하고 넉넉하게 품을 열어주어서, 힘을 빼고 편히 기댈 수 있어서 좋은 향긋한 시간. 하루 중 어느 모퉁이가 되었든 잠시라도 숨을 쉬어갈 수 있는 때를 꼭 붙잡을 수 있기를. 오늘 하루도 애썼을 당신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