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RARIS

두렵지만 꼭 가보고 싶은 행성

by 이게바라

오랜만에 영화 얘길 할 거야.


'솔라리스'라는 영화야.

며칠 전,

SF 단편 소설 하나를 읽었어. 불과 며칠 전에 본 소설인데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근데 그 단편소설로 'moon'을 경유하여 간 종착지가 'solaris' 야

'moon'은 이 영화야.


2009년도 영화인데, 복제인간 이야기야.

그 이야길 아주 심플하면서도 유니크하게 풀었어.

이 영화에 핵심적인 장면이 있어.

이 한 장면이 울림이 있었는데,

그 장면은 바로 이 장면이야.

참, 그거 알아야 돼. 난 스포 포함 막 얘기하는 거야.

달에서 3년간 홀로 노동자로 근무하던 샘은 복귀 시점이 되어서야 자신이 복제인간인 걸 깨달아.

그런 그가 울면서 이렇게 얘기해, 집에 가고 싶다고.

그에게 집이 있을 턱이 없는데 말야. 또한 집이 없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난 이 장면이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저려.

왜일까?

그 의문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종착지인 '솔라리스'로 가자.

'솔라리스'는 이 영화 속 행성 이름이야.

같지만 다른 행성 하나가 더 있어.

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키가 만든 '솔라리스'야.


여기 같으나 다른 두 행성 사이에는 30년 터울이 있어.

타르코스프키의 '솔라리스'는 1972년.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제임스 캐머런 제작의 '솔라리스'는 2002년이니 말이야.

이 30년 터울의 차이를 여자주인공 캐릭터로 설명해보려고 해.

이 행성은 일종의 뇌라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데.

그리고 그 내면, 무의식을 물질화시켜.

인간이 꾸는 꿈의 주인공이 현실화되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눈앞에 나타난다는 거야.

실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어떨 거 같아?

장르로 따지면, 호러? 판타지? 멜로? 그래 대부분은 포르노 일지 모르겠다.

근데 이 행성을 찾은 주인공 크리스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그의 심연에는 자살로 죽은 아내가 있었으니 말야.

그래, 그렇게 해서 그의 앞에 죽었던 아내가 나타나.


72년도 솔라리스에 아내는 '하라'라는 이름으로.

2002년 솔라리스 아내는 '레아'로 등장하지.

30년 터울이 둘의 캐릭터를 다르게 바꿔놨어.

가장 큰 차이가 두 가지가 있어.


첫 번째가 자살 이유야.

72년도의 '하라'의 자살에는 고부간의 갈등이 꽤나 중요한 이유로 부곽이 되는데,

2002년도 '레아' 죽음은 좀 더 복잡해.

크리스의 끊임없이 프러포즈에 결혼한 레아는 크리스의 아이를 지우기까지 하지.

그것이 원인이 되어 크리스는 레아를 떠나고,

이 때문에 레아가 목숨을 끊어.

레아 입자에서 항변하면,

사랑에 왜 결혼이 전제가 되어야 하고 반드시 아이가 사랑의 결과물이 돼야 되는 거야.

2002년도 레아는 진보적이지만 사랑에 목숨을 건 이해가 되지 않는 낭만적인 캐릭터야.

그리고 두 번째 차이점은,

엔딩에서 보여주는 '하라'와 '레아'의 역할이야.

그 역할의 차이를 말하기에 앞서 '하라'와 '레아'를 잠깐 짚고 넘어갈게.

사실 엔딩에서의 '하라'와 '레아'는 실제 '하라'와 '레아'가 아니잖아.

크리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물질화된 '하라'와 레아'일 뿐이지.

그런데 이들은 자신이 실제 크리스의 아내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게 돼.

그러면서 그녀는 놀라운 결정을 하는데,

그것이 자살이야.

인간의 기억이 만들어낸 인간도 아닌 무엇이 자신임을 인지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대목에서

그들이 정말 하나의 생명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그들은 자살로 고귀한 존재임을 인정받은 셈이지.

또 하나,

실제 '하라'와 '레아'가 선택한 자살은 남편이 떠남으로 선택된 자살이잖아.

72년 '하라'는 가부장 플레임에 벗어나지 못해 보이고.

2002년 '레아'는 다분히 의존적인 사랑에 목을 맨 여자로 말이야.

그러고 보면 '레아'는 아이를 낳지 않은 것도 주체적인 여성으로 삶을 살고자 그랬던 것이 아니라

아직은 주체적인 여성으로 서지 못 했기에 아이를 거부한 것으로 보여.

불완전한 '레아'와 가부장 플레임 속 '하라'. 다 주체적인 여성이 아닌 셈이야.

그런데

크리스가 만들어낸,

엄밀히는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하라'와 '레아'는

자신의 존재를 되묻고 자살이라는 결론을 돌출해내는 주체적인 캐릭터로 거듭난 거지.


자, '하라'와 '레아'의 두 번째 차이점은 이래.


이 차이가 바로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야.

72년도 '하라'는 사라져. 스스로 결정하고 주위 사람을 설득까지 해서 말이지.

사실 이 때문에 - '하라'를 사라지게 하기 위해 기계를 작동함으로 ~

솔라리스의 힘이 더욱 강력해지는 원인도 되지만.

그 자체로 숭고하고 고귀한 행동이야.

앞서 벌인 인간을 흉내 낸 죽음에 비해서 더욱 성숙된 선택이지.

그렇다면 이보다 진일보한 것처럼 보이는 '레아'는 어떤가 하면,

'레아'도 사라지는 것은 마찬가지야.

그로인해 솔라리스의 힘이 막강해진 것도 같아 보여.

그로인해 놀라운 일이 벌어져.

지구로 귀환해 생활하는 것처럼 보이는 크리스는 실상 그렇지 않아.

자신의 상처가 금방 아무는 것을 보고,

크리스는 더 이상 자신이 인간 크리스가 아님을 알게 돼.

그렇다면 크리스는 뭐지?

그때 '레아'가 크리스 앞에 나타나지.

크리스는 무지한 아이처럼 두려움에 가득 차서 '레아'에게 물어. 자신이 죽은 거냐고?

이에 대답하는 '레아'는 마치 신과 엄마를 합쳐놓은 것처럼 여유롭고 인자하게 대답해.

이제 그런 생각 할 필요 없다고.

크리스가 '레아'라는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물질화된 '레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엔딩의 크리스는 '레아(솔라리스)'의 세계 속에 예속된 무의식이 돼버리고 만 거지.

이것이 2002년도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이 만든 '솔라리스'의 엔딩이야.

그에 반해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엔딩은 나름의 무의식을 확장하는데,

그 장면이 바로 할아버지 집을 본떠 만든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안기는 대목이야.

이 역시 가부장 플레임이기는 한데, 개인적으로 강력하게 생각나는 영화의 장면이 있어.

<매그놀리아>의 톰 크루즈가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 아기처럼 우는 장면이야.

여기서 톰 크루즈의 캐릭터는 '여성에게 군림하는 멋진 남자가 되는 법' 따위의 주제로 강의하는 인기 강사 역이야.

여기서의 톰 크루즈의 강의 모습은 마치 엔터테이너화된 사이비 교주 같아.

그만큼 톰 크루즈는 자신감에 넘치는 마초 중에 마초인데,

죽어가는 아버지 앞에서 울어. 아기처럼 엉엉 울어. 자신을 왜 챙겨주지 않고 버렸냐면서.

가부장제의 사회의 모든 아들들의 무의식 속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겠지. 어떤 모습으로든 말야.

사실 이 엔딩이 '솔라리스'를 설명하는 영화의 엔딩으로는 맞다고도 말할 수 있어.

하지만

'하라' 그러니까 '레아'의 캐릭터만 놓고 생각해볼 때는

2002년도의 '솔라리스'에 손을 들어주고 싶어.


다시 경유지 'moon'으로 돌아가 볼게.

샘은 자신에게 주입된 기억으로 집을 그리워 하며 우는 캐릭터 였다면,

'솔라리스'의 하라와 레아는 자신을 만든 기억의 한계를 나무라는 캐릭터야.

자신의 존재를 그 밑바닥부터 의심한달까?

특히 레아는 그로인해 자신을 만든 존재인 크리스를 집어삼켜 마치 신처럼 엔딩을 장식하지.


영화 <솔라리스>는 이 밖에도 할 얘기가 너무 많아.

하지만

나는 '하라' 그러니까 '레아'에 대해서만 얘기해 보았어.

그리고, '하라'와 '레아'의 차이도 조금 생각해 봤어.

거기엔 30년 이란 세월도 한 몫을 한 거 같아.

그래서인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레아'도 마뜩치 않은 대목이 있긴 해.

그렇지만

영화란 것이 늘 그렇지만 해결책이 어딨겠어.


2002 '솔라리스'에서 크리스를 솔라리스에 부른 친구가 나타나서 한 얘기로 마무리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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