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염소를 키웠었거든. 근데 소하고 염소는 키우면서 이상하게 미안해. 잡아먹을 거라. 염소가 사람 잘 따르거든. 졸졸졸 따라오는데 마음이 좀 그래.
구씨
그래서 잡아먹었냐? 졸졸졸 따라붙던 거?
미정
딴 집 염소랑 바꿔서. 키우던 거 원래 서로 바꿔 먹어.
구씨
야, 굳이 바꿔 가면서까지 뭐 이렇게 잡아먹냐? 안 먹고 말지.
미정
그럼 버리나?
구씨
그냥 키우면 되지.
미정
못 키워. 염소가 얼마나 많이 먹는데. 자는 시간 빼고 24시간 먹어. 아빠가 꼴 베러 다니다 지쳐서 잡은 거야.
구씨
야 이름 불러 가면서 키우던 게 목으로 넘어가냐?
미정
이름 없었어. 잡아먹을 건 원래 이름 지어주지 않아.
구씨
야. 너, 씨. 나 빨리 이름 지어 줘, 어? 이름 지어 줘, 나 잡아먹지 못하게.
미정
구씨잖아.
이 장면 너무 알콩달콩합니다. 근데 아직도 미정은 구씨의 이름을 알지 못하네요.
그럼에도 둘 간의 추앙에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문제는 외부에서 침입합니다.
구씨의 선배 도박 중독자 현진이 미정이 집까지 쳐들어온 겁니다.
현진
재밌냐, 연기하고 사는 거? 쇼 그만하라고 새꺄. 취미로 목공 한다고 해도 믿을까 말까야. 너만 바라보고 있는 놈들 생각하라고, 새끼야. 승재 아빠방 나가. 영일인 주방에서 과일 깎고 나보곤 삐끼 하란다. 우리가 너한테 세트로 끼워팔기 되는 인간들이지 언제 한 번이라도 자생 가치 있어 본 놈들이냐? ....(한숨) 미안하다, 새끼야. 형이 돼 갖고 동생한테 빌붙어 먹어서. 야, 인마, 신회장이 오랄 때 감사합니다, 하고 갔어야지, 새끼야. 왜 노인네 기분 잡치게 만들어. 여기까지 찾아온 양반을! 너 이제 백사장 손에 죽는 게 아니고 신회장 손에 죽게 생겼어. 너, 인마 여기 여자 있지?
구씨
(보는)
현진
있어. 와! 있어, 이 새끼. 하, 참. 와~
다음 장면에서 구씨가 한 행동은 들개들에게 햇빛 가림막을 만들어줍니다.
기껏해야 큰 파라솔 하나 설치하는 건데요,
좀 뜬금없는 행동 같지만 나름의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집도 없이 주변을 어슬렁대는 들개떼는 밭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디로든 튀고자 그러는 거라고 미정이 설명해줍니다. 그런 들개떼는 현진을 포함한 그 세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씨가 만들어 논 저 파라솔이 현진을 비롯 아빠방 나가는 승재. 과일 깎는 영일이의 가림막이 되겠다는 의미일까요?
10화 시작에 구씨는 들개에게 겁도 없이 먹이를 주려고 했던 모습도 기억나네요.
그때도 ‘백사장’을 만나고 이어 붙은 장면에서 그랬거든요.
그때는 들개들에게 공격당하려고 하는 것을 미정이 구해줍니다. 그때의 들개는 ‘백사장’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리고 보니 이 들개가 있는 이 벌판이 바로 구씨와 미정의 실질적 첫 데이트 장소이기도 합니다. 7화에서 구씨가 끓여준 라면을 먹고 바로 이곳에 왔더랬습니다.
아, 그리고 여기 ‘해방클럽’ 멤버가 늘었네요.
다름 아닌 행복지원센터 상담팀장님이세요.
향기
그날 참관하고 난 뒤로 계속 오고 싶었는데요. 이제야 용기 내서 왔습니다. 해방되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단은 이 표정, 무표정이 안 돼요. 눈앞에 사람이 보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하나도 행복하지 않는데, 뭐 행복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이렇게 웃을 정도로 좋지도 않은데 사람만 보이면 자동적으로 이런 표정이 돼요. 그래서 상갓집 가는 게 너무 힘들어요. 상갓집 갈 때마다 억지로라도 무표정해 보려고 애쓰는데, 힘들어요.
성민
환영합니다. 우선 우리 해방클럽의 강령을 말씀드리자면...
향기
네, 알아요. 조언하지 않는다. 위로하지 않는다.
성민
그건 부칙이고. (태훈보며) 말씀드리지.
태훈
행복하자고 모인 모임이니까 저희 인생을 좀 정직하게 들여다보고자 하는 차원에서 세 가지 강령을 정했습니다.
향기
아, 네.
태훈
일,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향기
네, 저한테 딱 맞는 말이네요.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태훈
이,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삼, 정직하게 보겠다.
향기
어, 근데요, 전 왜 음.. 정직한 게 무서울까요?
태훈
자신한테만 정직하시면 돼요, 속으로.
향기
아, 네. 어유, 깜짝이야. 전 오늘 바로 탈퇴할 뻔했어요, 무서워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미정은 구씨에게 톡을 보냅니다.
[ 치즈 살까, 육포 살까? ] 답톡이 없어서,
[ 그냥 둘 다 샀어요. ] 1이 사라지지 않아서 전화를 걸려고 하는데.
창밖으로 구씨가 소주를 사가지고 걸어가네요.
마을버스에서 내리는 미정.
구씨
와, 염미정이다.
미정
(미소)
걷는 미정과 구씨.
미정
그분은 진짜 그냥 해피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다들 힘들게 연기하며 사나 봐.
구씨
연기 아닌 인생이 어디 있니?
미정
그쪽도 연기하나?
구씨
무지 한다. 넌 안 하냐?
미정
하지? 수더분한 척 또 어떻게 생각하면 다들 연기하며 사니까 이 정도로 지구가 단정하게 흘러가는 거지. 내가 오늘 아무 연기도 안 한다고 하면 어떤 인간 잡아먹을걸? 난 이상하게 너무너무 사랑스러운 걸 보면 주물러 터트려서 먹어버리고 싶어. 한입에 꿀꺽.
구씨
(멈춰서는)
미정
(따라 멈추는)
구씨
이제 아무 얘기나 막 하는구나.
염소 잡아먹는 얘기보다 사랑스런 얘긴데,
구씨의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여기는 태훈이 딸 유림에게 기정과 사귀기로 한 걸 얘기한 모양입니다.
유림
그 아줌마 좋아? 고모 친구. 어디가 좋은데?
태훈
음.... 아빠를 쉬게 해줘. 파이팅 넘치게 즐겁지 않아도 돼서 좋아.
아빠가 그렇게 즐거운 사람은 아니잖아.
유림
다행이네.
그럼 창희 애정전선은 어떤지 보면은,
창희에게 관심을 보인 다연’이 – 5화에 나왔던 – 다시 등장합니다.
5화 때도 그랬지만 창희에게 관심을 보이는 다연을 롤스로이스로 집까지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이마저도 앞에 차가 가로막고 있는 바람에 다연은 한참을 기다리다가 택시를 타고 집에 갑니다. 창희는 다연과는 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차에 태워 데려다준다는 것은 연애의 시작인 거 같아요.
하지만 기정은 다릅니다. 집에 데려다주겠다는 태훈을 한사코 거부합니다.
태훈
아, 진짜 태워다 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기정
아이, 들어가세요, 얼른. 예, 갈게요, 예.
(서둘러 가다가 발걸음이 느려지는) 이런 바보. 차를 안 타면 어디서 키스를 하냐?
이런, 씨. 오늘 키스하자는 거였어.
(돌아보며 한다는 말이) 다음에 우리 꼭 자요.
이러는 기정이네요. 하하...
이렇게 차 얘기를 하다가 덜컥 롤스로이스 뒤범퍼가 우그러져 있는 겁니다.
창희 난감해 하다가 구씨에게 범퍼를 보여주고,
이를 본 구씨, 창희를 잡으려 쫓고, 창희는 도망칩니다.
도망치고 쫓다가 당미역까지 달려온 창희와 구씨는 전철을 타고 서울을 갑니다.
창희는 그길로 현아의 애인을 만나러 갔습니다. 엄밀히는 전 애인(혁수)입니다.
9화에서 미정이 현아를 찾았을 때 현아 남친이랑 싸우는 걸 보고 그냥 뒤돌았던 장면 기억하시나요? 그때 현아가 남친이랑 싸웠던 이유가 혁수를 케어하다가 싸웠던 겁니다.
혁수는 암으로 죽어가는 현아의 전 애인입니다.
달리는 창희에서 나오는 현아의 목소리.
현아
그 사람이 너 보고 싶대. 내가 맨날 창희, 창희 했으니까.
창희는 구씨에게 쫓기던 그 길로 병원으로 가 혁수를 만납니다.
혁수
(창희를 보고) 그러게 생겼다.
창희
뭐, 어떻게 생겼는데요?
혁수
(웃는)
구씨도 그 길로 현진을 찾아왔습니다.
구씨
마담으로 있을 때 정말 더럽게 안 팔리던 선수 새끼 하나 있었는데, 안 팔릴만했어, 애새끼가 인간의 맛이 없어. 인간이라면 무슨, 응? 맛이라는 게 있는데 입만 열면 거짓말에 잘난 척에 그래서 내가 더럽게 구박했는데, 이 바닥에서 사라졌나 했는데 여전히 있더라고, 저 새끼가 어떻게 살아남았나, 했더니 산타가 됐더라고. 약 판대. 얼마 전에 봤어. 백사장 가게에서. 쯧 백사장 그 새끼 약 팔어.
현진
백사장 친다. 너 믿고 친다. 회장님한테 말한다, 너 온다고!
현진은 바로 경찰에 찌르고, 백사장은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구씨는 밭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미정에게 말을 합니다.
구씨
그만 가 볼까 하고.
미정
어딜?
구씨
서울에.
미정
갑자기 왜?
구씨
응, 그렇게 됐어.
서로의 집으로 가느라 둘은 갈라집니다.
그날 밤 눈물을 훔치던 미정, 구씨네 집으로 찾아갑니다.
구씨는 소주병을 치우고 있습니다.
미정
가끔 연락할게. 가끔 봐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구씨
뭐 하러? 깔끔하게 살고 싶다. 내가 무슨 일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전혀 감 못 잡진 않았을 거고 이 세계는 이 세계인 거고 그 세계는 그 세계인 거고.
미정
상관없다고 했잖아. 어떻게 살았는지.
구씨
어떻게 살았는지 상관없다고 어떻게 사는지도 상관없겠냐? 난 괜찮거든,
내 인생. 욕하고 싶으면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해. 화 안 나냐?
미정
나는.....
구씨
나는 뭐? 말해.
미정
나는 화는 안 나.
구씨
그만두고 떠난다는데 화 안 나?
미정
돌아가고 싶다는 거잖아. 가고 싶다는 건데,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있어.
더 있다 가라고 할 수도 있어. 서운해. 근데 화는 안 나. 모르지, 나중에 화날지도.
구씨
너도 웬만하면 서울 들어가 살아, 응? 평범하게, 사람들 틈에서.
미정
지금도 평범해. 지겹게 평범해.
구씨
평범은 같은 욕망을 가질 때 그럴 때 평범하다고 하는 거야. 추앙, 해방 같은 거 말고, 남들 다 갖는 욕망. 니네 오빠 말처럼 끌어야 되는 유모차를 갖고 있는 여자들처럼.
미정
애는 업을 거야. 당신을 업고 싶어. 한 살짜리 당신을 업고 싶어.
구씨
그렇니까 이렇게 살지.
미정
나는 이렇게 살 거야. 그냥 이렇게 살 거야. 전화할 거야. 짜증스럽게 받아도 할 거야.
자주 안 해.
구씨가 롤스로이스를 몰고 서울 가는 길에 들개 무리가 잡히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구씨가 설치한 파라솔이 들개를 잡을 수 있게 했나 봅니다. 왜 그랬잖아요,
들개들이 밭 한가운데 있는 것은 사방으로 도망가기 위해서였다고.
구씨의 파라솔이 덫이 된 겁니다.
그리고 보니, 구씨가 있는 장소가 현진, 백사장, 신회장까지 모두가 알고 있으니 그는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 들개들이 엄씨네 가족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잖아요.
구씨는 ‘추앙’을 배신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긴 하지만 구씨도 그 들개 무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음 장면에는 덫에 걸린 백사장이 보입니다. 백사장은 그만 경찰에 쫓기다 죽고 맙니다.
장례씩장의 구씨 대사입니다.
구씨
(슬프게 웃는) 나는 누가 죽는 게 이렇게 시원하다.
퇴근길의 미정이 혼잣말을 합니다.
(독백이기도 하지만 ‘해방일지’에 쓰는 내용일 겁니다.)
미정
행복한 척하지 않겠다. 불행한 척하지 않겠다. 정직하게 보겠다. 나를 떠난 모든 남자들이 불행하길 바랬어. 내가 하찮은 인간인 걸 확인한 인간들은 지구상에서 다 사라져 버려야 되는 것처럼 죽어 없어지길 바랬어. 당신이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길 바랄 거야. 숙취로 고생하는 날이 하루도 없길 바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