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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게바라 Sep 18. 2023

9월 18일  월 _ 2023년

영화 <잠>에 대한 두둔


누군가 <잠>을 <곡성>과 비교하니 납득할 수도 없을뿐더러

영화 <잠>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영화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기에 영화 <잠>을 두둔하려고 합니다.

그 영화가 얼마나 독창적이고 뛰어난 영화인지 말입니다.


유재선 감독


영화 <잠>을 말하기에 앞서 ‘호러 영화’는 무엇입니까?

‘호러 영화’라 함은 ‘두려움’을 유발하는 영화입니다.

이 ‘두려움’을 일으키는 여러 방법이 있을 텐데요,

그 방법 중에 가장 근사한 접근이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악령이 들린 물건 혹은 외딴 공간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악령 들린 물건이나 뭔가 일어날 것 같은 공간에서 인간이 대처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

인간 마음속 말입니다.

혹은 인간의 마음과 상황, 혹은 소재 등이 잘 결합된 형태도 있습니다.

일테면 이런 겁니다.

영화 <미스트>에서는 안갯속 무언가에 직면한 인간이 싸우는 것은 그 무언가가 아닌 그 무언가에 직면해 있는 그 상태입니다. 그 상황에 직면한 인간의 두려움이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아붙입니다.



이 같은 방법도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충분히 좋은 접근입니다.

영화 <곡성>이 좋은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아마 영화 <곡성>은 시작은 오컬트 영화의 고전 <엑소시스트>에서 시작했을 겁니다.

‘악령에 씌인 딸’을 구하는 얘기 말입니다.

이 엑소시즘이라는 큰 전제의 공간을 아시아, 그것도 대한민국 전라남도 곡성으로 가져오니 이리 새롭다 못해 혁신적인 영화가 되었습니다.

<곡성>이 혁신적인 이유는 공간을 바꾼 것에만 기인하지 않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을 고스란히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믿을 거냐?

천우희는 곽도원에게 ‘기냥 믿어’라고 말하고

일본인은 곽도원에게 ‘말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결국

곽도원은 일본인의 하수인 일광의 말을 믿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의 곽도원은 기를 쓰고 알려고 애를 쓰지만, 그는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기에 무엇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 자체가 너무나도 큰 ‘두려움’입니다.

한편 가톨릭 신부 양이삼에게는 그가 아는 만큼 일본인이 변모합니다.

딱 그의 믿음의 한계치만큼만 말입니다.

결국 그의 앞에 보이는 일본인의 모습은 양이삼이 믿는 이미지입니다.

영화상에서 양이삼은 일본인이 악마가 아닐 거라고 말하지만, 아닐 거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자기의 ‘믿음’을 부인하는 것이고, ‘믿음’을 부인하는 것은 ‘믿음’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부 양이삼에게는 그가 부인하고자 하는 ‘믿음’이 눈앞에서 실현되는 것은 크나큰 ‘두려움’입니다.



마지막으로 예 하나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제목부터 ‘믿음’이 노출된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 <불신지옥>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영화도 <건축학개론>으로 유명해진 이용주 감독의 데뷔작이네요

여튼 이 영화에서,

신내림 받은 심은경을 두고 엄마는 메시아라 믿었고,

이 같은 심은경을 두고 이웃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데 이용하려 했습니다.

이를 수사하던 류승룡조차 자신의 딸을 위해 편의적으로 믿음을 가지려 합니다.

이 영화는 ‘믿음’이 귀신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그렇다면

영화 <잠>에서는 이 ‘믿음’을 어떻게 다뤘는지 보겠습니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정유미의 ‘마음’을 따라갑니다. 그녀의 시선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녀가 ‘믿는 것’을 함께 믿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영화는 오컬트라는 장르와 전적으로 일치합니다.

이 영화는 그 ‘믿음’을 장르 영화라는 틀안에 넣고 자유자재로 어르고 달랩니다.

이건 마치 예능 프로에서 철가방 안에 사물을 넣고 빠르게 열었다가 닫으며 무엇이 보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잠>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유미의 ‘믿음’은 ‘공포’가 되고 급기야는 정유미의 ‘믿음’이 이선균을 비롯한 주변 사람에게는 실제적인 ‘공포’가 됩니다.

여기까지 이르러 영화는 뜻밖의 교훈을 던지며 돌연 끝이 납니다.

이 결말이 오컬트 장르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는 싱겁고 이도 저도 아니며 어정쩡한 영화로 보일 수 있습니다.

물론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잠>은 탁월한 영화입니다.

한국 영화 역사상 오컬트 영화의 마스터피스가 된 <곡성>이나 앞서 언급한 인간의 ‘믿음’이 무서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불신지옥>에서는 가톨릭, 개신교, 그 외 토속신앙 등 믿음의 근거들이 마구 튀어나옵니다. 또한 영화상에서 실제 합니다.

하지만 <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정유미의 ‘믿음’만 있습니다.

그 ‘믿음’ 하나로 장르 영화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영화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음에도

영화 <잠>은 정유미가 지키려 했던 ‘믿음’마저 실현합니다.

그리하여 영화 <잠>은 정유미의 ‘믿음’을 지켜내며 해피엔딩으로 끝이 납니다.

달리 생각하면,

정유미는 자신의 ‘믿음’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며 영화는 끝이 남으로 무서운 엔딩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는 듯 누워 있는 정유미에서,

이선균의 코 고는 소리에서 영화가 끝이 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인간은 깊은 잠을 자는 것처럼

자신의 ‘믿음’에서 깨어나기 힘듬가 봅니다.


그런 의미로 영화 <잠>은 참 무서운 영화입니다.


두고두고 회자될 영화 <잠> 얘기는 이 정도에서 멈추고,

저는 <잠>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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