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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Oct 17. 2016

어느 가을 아침의 에스프레소

에세이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출간 소식

해가 무척 짧아졌다. 8시가 되도록 훤했던 날이 얼마 전인 듯한데, 이젠 6시가 조금 넘으면 빨간 해가 보이고 7시면 세상이 깜깜해진다. 날도 춥다. 추석 연휴까지만 해도 반팔을 입고 덥다며 투덜댔는데, 한 달이 지나니 일기 예보의 숫자가 제법 간단한 한 자릿수. 아직 이르다 싶으면서도 코트를 덮고 있던 세탁소 비닐을 벗겨냈다. 저녁이면 보일러를 살짝 한두 번 돌려야 자다가 추워 깨는 일이 없다. 사계절은 어딜 가고, 아 더워 다음은 바로 앗 추워가 되는 것인지 전과 다른 가을의 날씨가 아쉽다.





이런 날씨엔 아침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밤새 내내 나에게서 발산되었을 열기를 가득 안은 이불을 끌어안고, 이불 밖으로 손가락 하나 꺼내는 것도 차가워 싫다. 어제 빨아 덮은 이불에서는 섬유유연제의 보드라운 내음이 배어나고, 베갯속에 파묻힌 머리는 좀처럼 빠져나오질 않는다. 이리 데굴, 저리 데굴, 이제 정말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은 때엔 꼭 한 번에 벌떡! 빠져나와야 한다. 미적거리다간 또 애교 많은 이불 녀석에게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찬 공기의 방 안을 직립 보행하는 아침의 시작은 에스프레소와 함께다. 캡슐커피로도, 모카포트로도 즐기는데 쓰디쓴 맛에 오만상을 찌푸리다, 두 번째 모금부터는 제 맛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쓴 맛만 가득한데도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하면 새 맛을 느끼니, 사람은 어느 쓰디쓴 순간에도 의미를 발견하고 싶어 하는 존재일지도.




나의 첫 에스프레소


나에게 첫 에스프레소는 호텔 커피숍에서였다. 고등학생 때였던가, 친척 누군가의 결혼식에 갔다 일부 어른들이 로비에 모였고, 커피’나’ 한 잔 하자는 말로 로비 구석의 근사한 의자로 향했다. 다들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둘 다방커피 스타일을 즐겼던 때이니, ‘커피 세 잔’이란 주문에 ‘어떤 커피를 드릴까요?’ 하는 답이 돌아오는 호텔의 풍경을 어른들은 어색해했다. 이럴 때 만만한 것은 제일 싼 것이고, 에스프레소가 그것이었다. 발음까지 근사하게 에스프ㄹㄹㄹ레소. 그러나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모두가 당황했다. 이 쬐그마한 그릇은 간장종지인가. 촉망받는 미성년의 역량껏 제일 비싼 프라페를 주문했던 나는 괜히 미안했다. 우리 이모 삼촌들이 혹여 나 때문에 저 작은 걸 드시는 건 아닐까. 적당한 유자차쯤에서 끝낼걸.



에스프레소 위에 우유 거품을 살포시 얹은 마끼아또는 에스프레소를 좀 더 부드럽게 즐기는 방법이다.



한 모금 맛본 누군가가 ‘오살 나게 쓰다’며 얼굴을 찌푸렸다. 에스프ㄹㄹㄹㄹ레소라는 발음의 우아함과는 전혀 다른 맛의 진득한 검은 음료의 쓴 맛에 우리 모두의 혀는 움추러들었다. 함께 제공된 설탕을 한참 쏟아붓고 나서야 먹을 만하다는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그 뒤로 두고두고 에스프레소의 추억만 되새기시는 걸 보면 그 역시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주문에 대한 심리적 타협이었음은 틀림없다.




쓰지만 달고, 거칠지만 부드러운



에스프레소를 진짜 음미하기 시작한 때는 첫 회사를 그만둔 뒤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다. 커피 한 잔쯤은 아무렇지 않게 매일 사 마시던 대기업 직장인에서 커피 한 잔 값을 시급으로 받는 아르바이트생이 되었었다. 아침 일곱 시부터 한시까지 오픈 조로 일 한 석 달 남짓의 시간, 매일 아침 불과 몇 달 전의 나와 같은 출근길 직장인의 커피 주문을 받았다. 아침에 와서 할 일은 고정적이다. 얼음통의 얼음을 확인하고, 바리스타 앞의 냉장고에 일정량의 얼음을 덜어둘 것. 적절한 개수의 머그잔을 에스프레소 머신 위에 놓아둘 것. 일회용 컵의 개수를 확인하고 부족하면 박스에서 꺼내 수량을 미리 준비해둘 것. 드립 커피를 만들기 위한 그 날의 원두를 갈아 머신에 넣어 세팅하고,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둘 것. 대략 이 정도가 되면 오픈 준비가 끝난다. 그래도 시간의 여유가 조금 있는 날이면 바리스타가 그 날 기계 세팅을 확인하며 뽑은 에스프레소를 함께 음미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에스프레소 기계는 주변 환경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미각에 대해서는 나름의 자부심이 있는 집안 대표 시식가로서, 혀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 그 날의 첫 에스프레소 맛을 느낀다. 한 모금 가득이 아니라 조깅을 할 때처럼 습! 짧고 얕은 호흡으로 빨아들인 커피는 잠시 혀를 감싸는 동안 수많은 맛과 향을 안겨준다. 처음은 쓰고, 잠시 시다 끝 맛은 달다. 예상치 못한 쓴 맛에 깜짝 놀라 자빠졌던 첫 에스프레소와는 달리 조금씩 익숙해지니 여러 맛을 즐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좀 더 가면 어느 날은 뭔가 맛이 부드럽고, 또 다른 날은 왠지 거친 느낌까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또 조금 더 익숙해지면 습! 이후 입에서 코로 넘어온 커피 향의 차이도 느낄 수 있다. 요즘처럼 건조한 날씨엔 그 향이 좀 더 잘 느껴진다. 먼지도, 습기도 공중으로 쉬이 퍼져나가는 계절이라 나의 괜한 기분인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가을이면 에스프레소가 좀 더 좋아진달까.




한 권의 책과 에스프레소



책이라는 존재는 에스프레소와도 같다. 두 번째 회사를 그만두고서 언제나 장래희망으로 남아 있던 글쓰기를 정말 시작한 지 석 달 즈음 지난 시점, 책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에 나는 우아한 지식인의 세계로 초대를 받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메뉴판에서 에스프레소라는 단어를 처음 보던 그때처럼…  ‘출간제의를 받았는데~’하며 주변에 상의를 할 때는, 마음속의 함박웃음을 짓기엔 왠지 경박한 것 같아 살짝 입가에 미소만 머금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진짜 한 모금 맛보고서는 그 쓴 맛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좋아 시작한 글쓰기와는 또 다른 부담감이 찾아왔다. 이게 정말 책으로 엮을만한 이야기일까, 쓸 데 없는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고민에 한 문장을 적기가 어려웠다. 말하듯, 이야기하듯 쓰기가 어려워 누군가 내 앞에 있다 생각하고 중얼거린 것을 녹음했다 옮겨 적기도 했다. 단어 하나 고르는 것은 또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인지, 따뜻한? 따스한? 온화한? 마음속의 미미한 생각의 차이를 담기에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해 문장을 완성하는 데도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책을 만든다는 것은 제법 우아한 작업인 줄로만 알았다.



다른 방도는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원고를 기다리겠다던 에디터의 고마운 마음을 두고 도망갈 수는 없다. 매일 꾸준히, 일단 책상 앞에 앉아한 문장이라도 적어보자는 것, 쓴 맛을 극복하는 데는 그 이상이 없었다. 막막할 때면 일단 찬장을 열고 그릇을 비잉 둘러볼 뿐이었다. 그러다 보면 ‘저.. 할 이야기 있는데요.’ 수줍은 손을 드는 녀석이 보였다. 좀 빨리 손을 들어주면 좋았으련만... 하긴, 이 녀석들이 주춤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나의 찬장을, 나의 지난날을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살필 수 있었던 것도 같다. 조금씩 입술을 적시듯 마시며 에스프레소의 풍미를 느끼던 그때처럼 말이다. 인스턴트커피만큼 한 입에 맛이 좋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조금 거칠고 정돈되지 않더라도 그렇게 나는 나의 맛을 찾아갔다.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짧은 봄과 길고 무더운 여름이 지나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가 탄생했다. 늘 올려다보기 바쁜 삶에서 잠시나마 손에 쥔 찻잔을 내려다볼 수 있어 좋았던 나의 티타임, 늘 남의 삶을 보고 살았던 시선을 거두어 나를 살피는 시간을 주었던 나의 찻잔.. 아주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었던 나의 그릇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책이 되어 주었다. 혼자 사는 아이가 무슨 그릇이냐, 그걸로 차라리 옷을 사 입으라던 이야기들에 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좋아 내가 모은 그릇들은 내일 더 좋은 무언가로 대체될 수 있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에는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할 자격이 있다 나를 다독이던 그릇의 이야기를 담았다. 잘 내린 에스프레소가 좋은 커피음료의 기본이듯, 스스로가 잘 보살핀 자아가 우리의 삶을 맛있고, 건강하고 분위기 있게 만들어 줄 것이다. 쌀쌀한 가을 저녁, 오늘은 잠들기 전 나를 위해 따뜻한 차를 한 잔,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쓰지만 달고, 거칠지만 부드러운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나를 또 한 번 살필 수 있기를 바란다.








2015년 11월 18일, 브런치에 첫 글을 적었습니다.  3일을 꼬박 고민하며 적었던 글이지만, 아무리 읽어도 어설프고 부끄러워 이걸 올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습니다. '부끄러움은 어차피 영원히 함께일 거야' 하는 생각에 눈을 꼭 감고서 '발행' 버튼을 눌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자신 없던 글을 찾아주시고 따뜻한 말씀을 남겨주신 독자분들 덕분에 그다음, 또 그다음 글을 적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켜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책이, 그간 제게 주신 그 따뜻한 시선으로 독자분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준다면 저는 무척이나 행복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의 맛있고, 건강하고, 분위기 있는 삶을 응원합니다.



김율희 올림





<먹고 마시고 그릇하다> 북 트레일러 1화 - 잠자기 전 30분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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